인생 계획에도 없었던 좌충우돌 미국에서의 20년 삶 9

용벅 2023.07.18 08:03:27

그렇게 머리가 핑.....한 상태로 전화를 받고 나서 몇분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혼자 우두커니 멍하니 서 있었다. 교실로 다시 들어간 나는 교수님의 수업내용은 커녕 친구가 묻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누웠지만,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다음날 아침 약속시간에 맞춰서 오피스로 찾아갓다. 나중에 들은얘기였지만 우리때문에 그 오피스내 Staff들과 Director 까지 장장 몇일동안의 기나긴 회의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우리둘은 각각 다른 방으로 이끌려 들어갔으며 마치 경찰이 범인들을 취조하듯이 일단 Staff 들이 묻는 질문에만 대답을 하기 시작했고, 몇시간의 취조(?) 끝에 지금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인지, 거짓이 없는지 등을 맹세한다면 서류에 싸인을 하라고 하여 싸인을 했다. 물론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사실대로 모두 말을 했다. 일단 그날은 몇시간만으로 취조를 마치었고, 그 다음날 또다시 Director 와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Director 분은 정말 인상이 좋으신 분이었고, 대화를 하면서 인상만큼 온화하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분은 이미 유학생들이 암암리에 현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걸 알고 계신 분이었으며, 본인은 다 이해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을 내라던 말씀까지 해주셔서 감동까지 받았다. 

 

자초지정은 같이 수업듣는중 한명이었던 외국친구가 오피스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러 왔다고 했고, 유학생은 합법적으로 학교밖에서는 아직 일을 할수가 없다라는 말을 듣자 우리 둘의 이름을 대며, 현재 이 두사람은 어느 동네 어느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사실을 말했으며, 당시에 Advisor로 승진한지 얼마되지 않은 신입직원이 본때를 보여주자(?) 라는 마음을 먹고 우리둘을 찾으러 직접 행차 하신 것이었다. 그분이 행차하셨을 당시 우리 둘다 그 현장에 없었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있었다면 현장범으로 더 안좋은 결과를 자초했을것이다. 상담후 우리 둘 모두 잘못을 인정했으며, 그 신입직원분이 당연히 본인의 역할을 충분히 한것도 이해하고 있다. 학교 졸업하기 한달정도 전에 이런일이 일어났었고, 당시 OPT를 신청하려고 서류 제출을 준비하던 나에겐 청천벽력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두가지의 선택이 있엇다. 이민국에 신고하지 않는 대신, 

 

1. 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떠날것 or

2. 학기를 마치고 다른학교로 Transfer를 할것

 

나는 생각할것도 없이 당연히 2번을 택했고, 그 형은 더럽고 치사하다면서 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아직도 그 형과는 가끔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이기도 하고, 전화통화 할때마다 그 때 얘기를 곱 씹으며 대화를 시작하고는 한다. 물론 그 형은 그 얘기만 하면 항상 욕으로 시작하는건....이해는 한다.

 

다음날부터 나는 주변에 편입할 학교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한국에 연락해서도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약 두달좀 안되어 정말 운이 좋게 편입을 할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많이 도와주었던 지인들에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항상 머리속으로 생각하며 살고있다. 내가 많이 어려웠을때나 평소에도 나에게 도움을 주셨던 모든 지인들에게 은혜를 갚을수 있는 그런날들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생각을 하면 더더욱 열심히 살게되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물론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다고 항상 잊지 않으며 살고 있다.

 

새로운 학교로 편입하고 당분간은 학교생활만 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졸업할때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에 소질이 있는건 전혀 아니다. 소질이 있었다면 체육학과를 간다는건 말도 안될테니...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또 다시 사정이 생겨 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1년정도만 더 하면 졸업할 시기였으니, 유학 초창기때처럼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한번 더 잘못하면, 아니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한 행동이었기에 몇년동안 고생하며 쌓아왔던 결과물들, 신분, 그리고 미래의 모든것을 잃을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이란것이 없었다. 엄마랑은 전화통화는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전화 올때마다 아무일 없다고 하면서 걱정을 끼쳐 드리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래도 다 아셧으리라 생각한다. 본인도 타지에 나가서 고생해 보시고, 나보다 더 몇배는 힘들게 세상을 살아오셨으니...

 

마음을 굳게 먹고, 주중에는 학교에만 집중을 하며 수업을 듣고 페이퍼를 쓰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였고, 주말 (토,일)은 두 군데의 Grocery Store에서 하루에 16시간을 일했었다. 이틀동안 32시간 일을 했고 가끔씩 금요일 오후에 수업이 없거나 할일이 없었던 날에는 가서 일을 하곤했다. 또한 주중에 미국인들과 하는 축구팀에서 공격수를 맡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번 있는 시합에 왠만하면 참석해 운동도 하곤 했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