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계획에도 없었던 좌충우돌 미국에서의 20년 삶 14

용벅 2023.07.21 09:41:50

zocdoc 이라는 앱으로 의사를 찾기 시작했고, 몇일간의 리서치 후 드디어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던 의사선생님을 찾았다. 예약을 한후 2017 년 10월10일 첫 방문을 한다. 위치는 Upper East 에 있는 Park Ave 길에 위치하고 있었다. Upper West 만 살다가 반대쪽으로 처음 가본 나는 정말 차이가 많이 나는 건물들과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길거리, 건물들마다 서있는 도어맨들을 보며 깜짝 놀란다. 특히 그곳에 세워져 있던 Residential 건물들을 지나갈때 마다 만지며 그 촉감을 하나하나 느껴본다. 만약 나중에 내가 부자가 되어서 내 집을 짓는 다면 그러한 소재를 사용해 짓고 싶다고 혼자 얼굴에 웃음을 띄며 상상을 해본다. 동네가 좋아서 그런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정말 눈에 많이 띄었고, 산부인과 선생님과 상담후에 한 까페를 가서 항상 브런치를 먹었었는데, 너무나 맜있는 식당이었고, 항상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차 있엇다. 

 

그렇게 우리의 아이를 책임지어주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를 1시간이나 기다려 드디어 만났고, 약 1시간 정도 상담을 하였으며, 너무나 친절하고 정이 많은 의사선생님이셨다. 우리는 방문할때마다 항상 거의 1시간정도를 기다렸었는데, (어느날은 한시간반), 이유인즉슨 이분이 환자를 너무나 끔찍하게 생각을 하셔서 어느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고 항상 환자분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셨다. 그러니, 첫 환자가부터 1시간 밀리는 날은 마지막 환자까지 최소 한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어 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의사 선생님께 감사의 생각을 전했으며, 나중 와이프가 산후 우울증이 있었을때도 전화로 상담도 해주시는 마음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아기가 나오기 전 마지막 방문때 우리는 감사의 표시로 즐겨갔었던 베이커리에서 치즈케잌과 각종 베이커리등을 감사의 표시로 의사선생님 이하 스탭 분들께 대접을 해 드렸다. 나는 가끔 이분과 안부의 문자로 아들 사진을 보내드리고 연락을 하곤한다. 나중에 뉴욕 다시 방문하면 같이 식사도 할 계획이 있다. 

 

아기의 예정일은 5월 말이었고, 와이프는 5월초까지 일을 계속했다. 부른배를 이끌고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계단을 오르내리는게 안쓰러워 보여 내가 출근안하는 날 와이프가 퇴근할때면 주로 외식을 같이 했거나 임신했을동안 저녁식사는 거의 내가 담당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우리는 아기가 나오기 전에 좀 더 큰집으로 (그래봤자 큰 1bed apartment) 이사갈 계획을 했고, 아파트를 찾아서 이삿짐을 정리하고 그렇게 이사하는 날이 왔다. 당시에 난 야간 근무였기에 아침에 퇴근후 Mover 들이 오면 같이 할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열심히 일하고 있던 새벽 5시즈음 와이프에게 전화가 온다. 

 

"자기야~ 갑자기 물같은게 흘러 나오는거 같은데, 아마도 양수가 터진것 같아~" 라고 깜짝 놀란 목소리로 전화가 온다. 나는 침착하라고 하고 병원까지 택시를 타고 가 있으라고 한다. 바로 매니져에게 말을 하고, 집에 들려 산부인과에서 사용할 와이프가 미리 하나씩 싸놓은 물품들을 가방에 넣어서 챙기고 바로 병원으로 향한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해 나의 얼굴을 본 와이프는 환하게 미소짓는다. 잠시후에 담당자분이 오시더니 애기 머리가 충분히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으니 유도분만을 해보자고 제안하시고 우리는 바로 동의를 했다. 그렇게 유도분만을 20시간정도 했다.....기진맥진한 와이프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나는 혹시나 무슨일이 있지 않을까 하며 잠을 취하지 못했다. 우리의 담당 의사선생님이 오셔서 이젠 더이상 유도분만은 무리니 마지막 방법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해 아기를 꺼내자고 하신다. 우리 둘 모두 동의를 했고, 45분정도의 제왕절개 수술후 우리의 2세가 나오자 우리둘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펑펑 울었다. 

 

그렇게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며 펑펑 울다가 아기를 자세히 보니 약간 좀 이상해 보여, 아기 머리가 왜 저렇게 길쭉하게 생겼지? 라며 혼자 생각을 한다. 아기 머리가 마치 예전 어렸을때 봤었던 "콘헤드" 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았다. 갓난 아기를 난생 처음 봤기에 우리 둘다 의아해 했다. 그렇게 건강하게 아들이 태어나고 와이프는 첫날은 2인 1실을 썼는데, 둘째날부터는 돈을 내고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개인실로 옮기줬다. 개인실에서 머무는 도중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었는데, 우리 아기가 유난히 좀 노란색을 띈다고 몇일동안 파란 레이져 불빛으로 가득한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 치료(?) 를 한다고 했는데, 참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이 장면이 마치 미래 공상과학 영화의 한장면을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동양인이니 당연히 약간 노란색의 피부를 띄는게 아니겠는가??? 우리말고 다른 동양분들 아가도 이런 파란 레이져 불빛이 가득한 인큐베이터에서 꺼내지는 모습을 몇번 봤었다. 

 

4박5일을 입원했었는데, 보호자는 나뿐이 없어서 와이프가 퇴원하기전에 얼른 이사를 해야했고, 당시에 차가 없었기에 카시트도 사러 가야헸다. 첫 3일은 와이프와 함께 있기로 결심을 한다. (밥도 사다줘야 하고, 많이 도움이 필요하니....) 그렇게 퇴원하기 전날이 되어 오전부터 나는 예전 Mover 들을 불러서 이사를 하고 예전 아파트 청소를 하고 키를 반납하고, 카시트를 사오니 거의 저녁이 되었다. 병원에 돌아오자마자 다음날 퇴원 준비를 하고, 드디어 퇴원 하는 날이 되자 한번도 설치해보지 못했던 카시트를 택시 뒷자석에 설치를 하고, 거동이 불편한 와이프를 이끌고 같이 택시를 탄다. 

 

택시에 내려 나는 와이프에게 이번에는 엘리베이터에가 있는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를 했다. 와이프는 고맙다고 했으며 우리 층수로 올라와 아파트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 광경을 본 와이프는 가슴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통곡소리를 하며 서럽게 눈물 콧물까지 흘렸다. 맞다. 이사는 겨우겨우 맞췄지만 수많은 이삿짐 박스들은 하나도 풀지 못했다. 당시 우리는 아기 침대조차 없었으며, 원래 이사 할려고 했던그날 이후로 모든 물품들을 살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와이프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며 우리 둘은 서로를 안고 펑펑 울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가인 우리 아가는 무슨 영문인지 말똥말똥 우리를 쳐다봤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빠, 엄마 라는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