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뉴욕 #4

사리 2014.09.28 21:58:11
  촌스러운 인간인지라 시차 적응은 적응이 안되는 일이다. 올빼미로 살았어도 시차가 바뀌면 그게 그렇게 힘들다. 

오기전부터 몸살기운이 있었는데 너무 만만하게 봤나보다. 아침이 많이 무겁다. 

아침 산책을 나서려고 로비를 나갔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릴 거라는군… 로비에 있던 직원이 말해준다. 

이 상황에 무슨 용기인지 부슬거리는 비 사이로 잠시 걸어본다. 

누군가 그랬다… 미국만 오면 그렇게 우산 안쓰고 비를 맞고 걷게 된다고. 


느즈막히 아침겸 점심을 챙겨먹고 비 오는데 무얼할까 생각했다. 모마에 가볼까… 

대학 들어가고 나서부터 배낭여행을 시작하면서 하지 않은 것중의 하나는 이른바 “명소”에 가는 일이었다. 

태국에 20번 넘게 갔어도 아직 왕궁과 사원은 가본적도 없다. 

씨엠리업에서도 통틀어 13일인가 있게 되니 겨우 마지막 하루를 앙코르 와트에 간 정도이다. 

남들 가는 명소에 안가는 게 쿨해 보였나…?라고 생각해보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냥 죽치고 돌아다니다가 마음 끌리는 곳에서 동네사람들이랑 하루 종일 서로 딴 얘기 하다가 오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나는 한국말하고 상대방은 라오스말하고… 태국말 하고… 베트남말하고… 


모마에는 2010년 1월인가에 간 적이 있었는데, 팀버튼 전시 때문이었다. 

아는 분 모녀가 한국에서 오셨고 뉴욕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팀버튼 전시에 간다고 해서 엉겁결에 따라간 거였다. 

그리고 그 전시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그림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무식쟁이인지라, 그냥 지나가며 보다가 좋은 그림 앞에서는 넋놓고 한참 서 있는 정도. 

열여덟살 때로 기억하는데, 마흔이 되면 렘브란트 그림을 따라서 여행 한 번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물두살 때에는, 18세기 영국의 시계공 - 위도 경도에서 경도를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존 해리슨의 발자취를 따라서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먼 나이라고 생각했던 마흔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괘씸하게 볼 수 있겠지만요ㅎㅎ)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워져 왔고,

렘브란트와 존해리슨을 묶어서 그 궤적을 따라가는 여행은 꼼꼼히 준비해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충 이 그림이 몬드리안이네, 모네네, 미로네, 피카소네, 호퍼네, 고흐네 정도는 대충 구별하는 정도. 

그러나 모마에는 딱 두개만 내 눈으로 보고 오면 그걸로 족할 것 같았다 - 물론 너무 흔하디 흔하게 유명한 것이지만 말이다. 

하나는 고흐의 별헤는 밤이고, 하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주유소. 

현대카드 무료입장덕을 보고, 벌뗴처럼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드디어 보았다. 

별헤는 밤… 이게 진짜 작품일까? 대게 미술관에서는 정말로 유명한 작품은 진짜인 것처럼 모조품을 걸어 놓는 경우가 사실 허다하다. 

드디어 이걸 보았다고!!라는 감흥 보다는, 이거 진짜를 전시했을까 짭퉁을 전시했을까라는 의심부터 들게 된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에 “아우라”가 사라졌다고들 하는데, 아우라를 사라뜨린 건 “기술”복제가 아니라, 

복제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바로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이게 “고흐의 별헤는 밤”이라는 원작과 원본, 진뚱이라는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라기 보다는,

고흐의 별헤는 밤의 진뚱 원작과 원본이 있다고 증명된 “모마”에서 보게된 

(걸려 있는게 진뚱인지 모르고, 진뚱은 보관실에 있을지 모르지만) ‘별헤는 밤’이 주는 아우라이니, 아우라라는 결 자체가 한참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에드워드 호퍼… 물론 호퍼의 가장 엣지있는 작품이라는 나이트 호크는 시카고 미술관에 있지만 

책으로 봤을 때 나이트호크만큼이나 “뻑이 갔던 것은” 바로 주유소였다. 어쨌든 두 작품에서 30분이상씩 아우라 원적외선 좀 받아봤다.

퓨쳐리즘이라든지 혹은 포스트모던 미술들을 보는 건 가끔 재밌지만 대게는 속에서 화가 치미는 때가 있는데

그래서 월마트 약품칸 구경온 사람마냥 후루룩 봐버리고… 그외 피카소와 미로 작품을 좀 더 보고… 

어쨌든 어제 그제는 귀가 호사였다면 오늘은 눈이 호사인 날이다. 


촌스럽지만 작품들이랑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쎌카를 찍기엔 쑥스러운 나이이고, 누구 말마따나 “쎌카는 이쁜 여자애들이나 찍는 거야, 너 같은 인간은 언감생심이야”라는 어떤 친구의 신경질 섞인 잔소리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남한테 찍어 달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고…

궁리를 하다가, 굳이 이 큰 얼굴 나올 필요는 없지. 겸손하게 신체 일부분과 사진을 찍어 보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

새끼 손가락에 표정을 그려 넣어 사진을 찍어 봤는데… 이거 꽤 재밌다. 

어디가서 맨날 이러고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 제 전매특허임! 


미술관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엄청 많이 썼다. 벌써 해가 기울려고 한다. 

아침보단 얇아진 비를 맞으며 걷는게 길. 건너편에서 팟벨리 샌드위치 가게가 눈에 딱 띤다. 

아침 먹고 아무것도 안먹고 있었는데… 팟벨리라니! 

코스웍 시절… 가끔 팟벨리에서 먹는 따뜻한 샌드위치가 눈물 나게 고마울 때가 있었다. 뭐 이유는 구질구질하고 신파이니 그냥 넘어가보고 ㅎ…

“팟벨리다!” 라고 소리를 치는 순간 길거리에서 음악이 나오는데, 에릭 허친슨의 “Oh”라는 노래다.

이것도 코스웍 시절에 꽤 귀에 꼽고 다녔던 음반이었는데! 무단횡단하는데 옆차도 안보고 피리부는 사나이 따라가는 것마냥 정신줄 놓고 따라가본다. 

귀에는 “oh!”가 계속 들리고. 


늦은 점심겸 저녁을 먹고, 오전에 체크아웃한 숙소에 맡긴 짐을 찾아야했다. 

오늘은 또 다른 숙소.. 첼시에 있는 컴포트인. 뉴욕 오기 전에 무심코 BRG 신청했다가 된 곳. 

숙소로 가는 길, 펍에서 구스 아일랜드 에일을 드래프트로 팔고 있단다. 해피아워!

시카고 영향권(?)에 살았던 이로서 구스 아일랜드 드래프트를 안먹는다는 건 수치로운 일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펍에 드러가 낮술을 시킨다. 역시 술은 낮술이 최고. 

매주 금요일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맥주 두세개 정도 낮술을 먹었는데, 그게 일주일에서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고 곱게 따라진 술잔이 내어오는데,

펍스피커에서 “oh~ oh~ oh~ I~~~~ I was a city boy, riding ~~~” 

으하하하. 브루노 마스의 If I knew가 나온다. 브루노 마스노래 중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

지난 겨울에 가장 많이 들은 노래이다. 특히 친구들과 모여서 술마실 때에는 “이 노래 들어봐”라면서 얼마나 틀어재꼈던가! 

차안에서 혼자 틀고 목청껏 따라 부르다가 눈길에 미끄러져서 죽을뻔도 했던 노래다. 


새삼, 눈도 호강하고 귀도 호강하고, 입도 호강하는 요 며칠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몇달은 버틸 수 있으라고, 예방주사 맞는 거다라고 생각해본다.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오거나, 땅으로 꺼져버린다는 생각이 들면,

별 헤는 밤 앞에서 느꼈던, 주유소 앞에서 느꼈던,

헤드윅이 가르쳐 주었던, 누티니가 들려 주었던,

팟벨리와 허친슨의 찰나에 느껴버렸던,

구스아일랜드와 브루노 마스의 찰나에 떠올랐던,

그 순간으로 단디 붙잡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를 거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주를 마시고, 가방을 챙기고, 첼시의 컴포트인에서 체크인을 하고. 

오늘 숙박비는 공짜였기 때문에… 호기롭게 택시를 탔다. 

“Terminal 5라는 공연장에 가주세요.” 

21 Pilots 라는 사람들의 공연인데.. 내 취향은 아니고 좀 십대 취향이긴 하지만 한번 공연은 보고 싶었다.

티켓은 없었지만.. 미국에서 이런 공연이 있을 때마다 티켓 못구해도 그 앞에서 어슬렁대면,

친구가 못온 사람들이 던져주는 표와, 암표상이 파는 싼표를 구하는 건 알만큼 아는 통빱이다. 

다시 말해, 예약을 안한 것은, 그렇게 꼭 보고 싶은 공연이 아니었고 얻어 걸리면 보겠다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터미널 파이브가 무슨 곳인지 몰랐는데.. 이게 무슨 잠실종합경기장 같은 곳인가… 

뉴욕에 있는 백인 청소년은 여기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공연장을 뱀처럼 뚜아리로 둘러싼 줄은 끝이 없었는데, 뉴욕의 인종 구성비와 걸맞지 않게 정말로 거의 백인이 대다수. 

게다가 청소년 혹은 20대 초반 아이들. 

참고로, 내가 가장 미워하는 인구 집단 ㅎㅎ 

저 아이들이 갑자기 예전에 TA 들어갔던 수업에 학생들처럼 보이기 시작하면서 맥이 쫙 빠져버린다. 

학부생은 학부생이 아니라 “학부개”라고 불러야 정확한 호칭이다라며 이를 갈기도 했었던 ㅎㅎ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드웨스트의 전형적으로 순한 아이들이고 나이스 했지만

왕왕있었던,

가끔 평생 나 한번 차별 받은 적 없고 특권은 내꺼지만 난 특권이라고 생각안해라는 자세가 몸에 베인 소로리티 걸들,

나는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나는 남자야 그리고 세상을 좀 알지라는 것이 베인 프래터너티 보이들은 두통 그 자체였다. 


표고 나발이고 공연이고 나발이고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비는 그쳤고, 꽤 근사하고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 걸어가다 보니 다시 타임스퀘어가 어느덧 나온다. 

그리고 그냥 더 걸어서 메디슨 스퀘어까지… strand bookstore라고 했던가?

큰 중고 서점이 있다던데… 하면서 더 내려가본다. 


꽤 근사한 서점이었다. 

십대 청소년 아이들이 유리창에 진열된 the faults in our universe를 보더니 “존 그린!!”하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한 두달전 하도 청소년 애들한테 유명하길래 사서 봤는데, 문장은 꽤 기발했지만 얘기는 좀 부대끼길래 아는 청소년 아이한테 주었다. 

“안녕 헤이즐 원작인거죠?”라고 하면서 그 청소년 아이 참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서점을 올 이유는 있었다. 

올 초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굉장히 흡족해하며 읽었는데 딱 한 가지가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아주 훌륭한 작가인 김연수가 번역을 했기에 기대를 하면서 봤는데… 

한국에서 나오는 책들의 “번역”에 대해서 절대로 탓을 하지는 않는다. 

번역하는 일에 대한 처우가 번역에 대한 질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번역은 “질”을 따지기 전에 그 자체가 “자비로운 선행”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수 작가가 번역했다니 내심 기대가 엄청 됐는데… 소설 자체는 훌륭했지만, 번역에서 좀 아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중산층의 남자나 교양있는 여자가 화자일 때에는 번역이 좋은데

카버의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실직자 남자나 워킹 클래스 여자가 화자일 때에는 번역이 너무 “곱다.” 

예를 들어 시골의 워킹클래스의 저학력인 중년의 아주머니가 “다탁”이라는 말을 쓰는… 

그래서 카버의 원문은 어땠을까가 너무 궁금했었는데, 이북으로는 팔지 않았다.

아쉽게도 헌책은 없었지만 지하층 가장 한 구석에 카버의 작품집이 있어서 두어권 집어 들고

작가의 성이 C인 곳에 왔으니 온 김에 존 치버의 책도 한 권 집어 본다. 


쌀쌀한 공기게 코끝에 맺힌다. 

맥주 한잔에 윙이나 한 조각 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 

메디슨 스퀘어 앞쪽에 노점들이 있다. 

브루클린 로컬 에일 한잔과 코리안식 핫윙을 두어조각 시켰다. 

맥주는 맛이 없고 윙은 이상했다. 


숙소로 들어가 카버의 책을 펼쳤다. 

그런데…

토가 나오기 시작한다.

설사도 나오기 시작한다.

온몸에 열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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