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새벽, 차 한대 없이 뻥 뚫린 길을 달렸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처와 아이들이 빅허그, 그룹허그 인사를 마쳤다.
출장가는 처를 배웅하기 위해 아이들도 잠자다 일어나 공항에 왔다.
잠을 이기지 못한 3호는 그대로 차 안에서 잔 채로 공항에 갔다가,
집으로 왔다. 한 숨 더 자고 학교로 간 아이들.
그날 저녁, 모처럼 거실에 텐트를 쳤다. 이번엔 아이들이 먼저 텐트에서 자자고 했다.
이날 새벽 자다가 엄마를 배웅 못한 3호가 텐트에 누워 통화를 한다.
처가 간 다음날 목요일 아침, 깜깜하다. 정전이다. 창밖을 보니 동네 전기가 다 나갔다.
2호가 응급상황이라며 발전기 라디오를 가져다 튼다. 간밤에 '아이스 스톰'이 있었단다.
난방은 안되지만 가스 레인지는 쓸 수 있다.
어디서 찾았는지 이마에 불 하나 붙이고 아침을 먹는 3호.
아이들 학교 가는 길, 보니 동네가 여간 어수선 한게 아니다.
학교 입구 가는 길목은 쓰러진 나무로 아예 막혔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일단 차에 기름부터 가득 채워넣었다.
돌아 보니 생각보다 피해가 심했다.
부러진 가지에 지붕이며 차가 망가진 것도 보였다.
부산한 와중에 이날 3호 교실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날이다. 부랴부랴 배정받은 과일을 사갔다.
1호 2호 때는 처가 했던 일이라 낯설고 심심했다.
다행히 알고 지내던 크리스가 와서 심심함을 면했다.
형들과 있던 모습만 보다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3호를 보니 제법 의젓해 보였다.
대충 봐도 학교 생활 잘 하는 것 같다. 인사 하고 나왔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았다. 숙제도 하고 추위도 피할 겸 도서관으로 갔다.
저녁 시간이 되서 돌아온 집은 여전히 정전. 살겠다고 내복에 양말을 껴 입는 2호.
밥 없다. 고기 먹자.
그 사이에 1호와 3호도 내복에 긴 옷 챙겨 입고 식탁에 앉았다.
아침 마다 옷 더 입어라, 안 춥다, 안 입는다고 처와 싸우는 아이들이 제 손으로 껴 입었다. 하하.
금요일 아침엔 불이 들어오겠지 했지만, 춥다. 섭씨 10도가 안된다.
춥지 않았다며 게운하게 일어났으면 걸어갈 일이지, 태연하게 차를 탔다.
우리집엔 별 피해가 없는 줄 알았더니 뒷마당 라일락 나무가 부러졌다.
아무래도 정전이 길 듯한 불길한 예감. 일단 냉장고 음식부터 차 빠진 차고에 내다놨다.
*
미국 와서 정전 사태를 맞긴 이번이 두번째 입니다.
처음과 달리 아이들이 커서 불편함도 많이 줄고,
게다가 아이들은 즐기는 느낌도 드네요.
놀이 삼아 쳤던 텐트는 정말 요긴한 생존 키트가 되었습니다.
휴일을 앞둔 금요일은 저녁은 늘 길었는데,
이대로 정전이 이어진다면 매우 짧은 밤을 보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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