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건물 모양 본다고 고개를 쳐들고 이리저리 휘젓는데
옆에서 묘한 인척이 느껴졌다.
다시 내려 돌려 둘러보는데... 아하!
이 녀석이 뭔가를 잔뜩 올려다보고 있었다.
길거리 소화전.
노상 올려다보고 있으려면 목도 참 아프겠다.
누가 다녀갔는지, 신문지는 엉덩이 자국으로 폭 패여있고.
소화전이 때론 의자가 되고,
탁자가 되기도 했다.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순 없지만
새 옷 입고 단장해 윤기가 번들번들.
들여다보기 전, 소화전 하면 이런 모양이 떠올랐다.
그 만큼 오래전부터 그렇게 서 있어 왔기에
내 머리에 그리 박힌 것 이리라.
낡았지만, 친구 하나 옆에 두고 잘 버티고 서 있다.
빵모자를 썼다. 그 모자 벗겨 들고 냅다 튀고 싶은.
반짝반짝 빛나는 옷을 입었다.
녹슬지 마시고 장수하시길...
안경을 쓴 듯한, 어찌 보면 잠망경 같다.
초록 잠망경이 고개 숙인 친구 둘을 데리고...
곧고 바른 몸통이 아니다. 다음 생엔 등 펴고 서시길.
'숏다리'지만 솜씨 하나는 빠지지 않는다고 웅변한다.
다리 감추고 목만 내밀었다.
그런데 의문, 불 났을 때 온통 붉으면 잘 보일까?
그래서 넌 초록 옷을?
본디 녹색으로 태어난 녀석은 아닌가 보다.
녹색으로 덮였지만, 주변엔 래커 칠한 자국이...
붉은빛 몸통에 뚜껑은 녹색,
벗겨진 색깔 안에는 녹색이, 그렇다면^^
색도 색이지만,
어라, 이건 아래에 수도꼭지도 달렸네?
유난히 커다란 둥근 판, 근데 뚜껑 떼어갈까? 사슬로 꽁꽁!
화단에 보호색까지 하고 숨은 스프링클러.
그래서 푸른 잎 사이 붉은 칠을 했나.
이건 큰 물 구멍 아래 수도꼭지도 한 몸체에.
다리 감추고 목마저 움츠러들었다.
은색 몸통에 빨간색 마개로 치장한 소화전.
머리 올린 듯, 치렁거리지 말라고 잘 감은 사슬.
밋밋한 뚜껑에 아래 수도꼭지 손잡이가 달린.
돌벽에 낡은 소화전이 자연스럽다.
보호색을 한 듯해 급할 때 찾기 힘들지...
몸통도 뚜껑도 너무나 단순한.
소화전 '미니멀리즘' ?
번쩍번쩍, 금색 몸통에 노란색 마개.
반짝이는 몸통에 내 손 숨길 수 없었던.
제대로 사람 얼굴을 했다.
언듯 특별한 눈을 가진 로봇 같다.
계획대로 잘 짜 맞춘 조각 같기도 하고.
*
비자 받기가 힘들다는 소리에 제풀에 포기했던 미국 여행.
그래서 뉴욕은 늘 책 속에나 있던 여행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대치 않게 밟게 된 맨해튼.
마음에 품었던 코스를 밟다가, 문득 눈에 들어 온 소화전.
하나하나 따라다니며 보다 보니
미술관 작품 보는 것보다 재밌더라고요.
이건 아이들이 커서 스스로 여행을 하게 될 때면,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시간이 좀 남긴 했을 텐데, 성급하게 그때를 생각하며
사진과 메모를 다시 정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