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중 소년

포도씨 2019.08.26 19: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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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오렌지족의 비행과 외제차를 모는 야타족, 일부 외국물먹은 유학생들의 낯선 행태가 대한민국의 저녁 한때를 떠들썩하게 뉴스로 채우던 시절이었다. 나는 갓 상경하여 멋모르는 대학 신입생일 뿐이었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고 땀내쩔은 남자들만의 공간과는 사뭇 다르게 풋풋한 여자동기들을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쳐다 볼수 있었던 그 대학의 봄은 나에겐 천국의 다른 이름이었다. 표준서울말이 서투른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부끄럼많았던 나는 그 천국에서도 반강제적으로 과묵할수 밖에 없었다. 경상도 어디쯤에서 왔으리라 짐작되는 그 친구는 그러나 씩씩하게도 사투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부러웠다. 서로에게 존댓말이 서투르고 어색했던 신입생이었으나 나는 그의 그 억센 경상도사투리에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용기를 내었다. 

 

나: 고향이 어디세요? 

그: 아 고령요. 알아요? 

나: 네 나는 거기 어릴때 88고속도로 갈때 한번 지나갔는데. 

 

어릴적 기억을 쥐어 짜내어 고령이라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끈질기게 이어나가며 서울속 우리는 서로에게서 끈끈한 동지애를 발견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우리에게 일어나는 서울에서의 신기하고도 생소한 경험들은 우리의 찐득이는 갱상도으리를 더욱 더 단단히 해줄뿐이었다. 서울놈들이 불을 지피면 지필수록 단맛은 진해지고 찐득해지는 우리는 시골에서 고아내는 엿같은 촌놈들이었다. 촌놈때를 벗을때쯤에는 우리는 우리자신뿐만 아니라 서로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낯설지 않게 얘기할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대부분의 청춘이 그렇하듯 우리들의 20대도 그렇게 진일보 퇴일보를 계속하며 서툴고 어수선하게 하루하루를 채우고 어느새 30대가 되어 각각의 갈라진 삶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 후에도 우리는 종종 메세지로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각자의 이야기로 위안과 용기를 주고받으며 가끔은 밤늦도록 술로 서로를 달랬다.

 

 

헤어짐

우리는 서로에게 찬란했으나 부산했던 우리 20대의 한부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생각에는 그 친구와는 진정으로 마음이 통했으며 그 친구는 내 20대의 삶의 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고 내 삶을 채우는 다양한 이야기의 일부분이었으며 내 가슴 깊숙한 한 귀퉁이에 살아있는 마음의 소리였다. 나이를 먹고 삶의 다양한 변곡점들을 거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고 논쟁이나 다투는 일도 없어졌으며 그냥 그렇게 소원해졌으나 나는 그저 우리가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탓이라 생각했다. 

잘 지내? 우리 한번 봐야 돼. 지난번에도 바빠서 밥도 같이 못먹었자나. 

우리는 기계적으로라도 만남을 지속하며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으로 온 이후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갈라진 삶속에서 언제고 한국가면 보자는 기약없는 기다림만을 약속할수 밖에 없었고 그 친구에게서 안타까움 외에 재회에 대한 기대는 읽을 수 없었다. 

 

친구: 한국 언제 오노? 

나: 가야지. 때 되믄. 

 

나는 그 친구를 보고 싶었고 어떻게 변했을지 알고 싶었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고 그도 나와 같은 바램이리라 믿었다. 떨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아래 있고 바다는 이어져 있지 않은가? 그 무엇이 우리를 돌려세운다 해도 우리는 갱상도으리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만남

그 친구는 바빴다. 바쁜 업무로 일과를 보내고 동료들과 팀장님 파트장님과의 친목에도 목에 핏줄 올려가며 회사에 충성해야 했고 집에선 충실한 남편, 자상한 아빠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시간내달란다고 해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한가한 시간따위는 없었다. 아버지뻘되는 납품업체 사장님들이 모실래도 두 세달전에는 미리 얘기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루트였다. 그랬다. 내 친구는 인기가 많고 바쁜 사람이었지만 관대한 사람이었고 옛 추억을 반추할수 있는 두터운 정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미국사는 20년지기 친구나부랭이가 한국가기 며칠전 오랜만에 만나자고 연락해도 워낙에 바쁜탓에 좀더 일찍 얘기했어야 한다는 핀잔을 하면서도 나를 반갑게 만나주었다. 

이 새끼 몇년만이야? 오늘 내 특별히 양주로 달려준다잉. 

오랜만이라 반가웠지만 조심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이제 가까이 지내기 위해 다투지 않았고 상황이나 생각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사실은 내 친구가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미국얘기, 아이가 커나가는 얘기를 들려주었고 그 친구는 골프 스윙과 피니쉬, 비거리를 늘리는 법에 대해 얘기했다. 달러원환율얘기에는 잠깐 관심있는듯 했으나 이내 나는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말고, 그 친구가 듣길 바라는 가볍고 찰랑거리는 농담과 영화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렇게 만나고 나서 또 보자며 돌아서고 나서 나는 오히려 그 친구와 만나지 말았어야 했음을 선명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는 수명이 있다

공항에서 면세점에 잠깐 들렀다. 누군가 좋아했다던 시바스리갈 18년산, 로얄 살루트 21년 32년산, 발렌타인 21년 30년산, 글렌피닉, 맥켈란, 영화 킹스맨에 나오는 녹용없는 녹용주 달모어, 나는 처음 보는 50년산 특별판도 있었다. 오래될수록 더 비싸지는 양주. 내 "20년산" 친구도 양주처럼 오래 될수록 좋으면 안되는 것일까? 

20년지기 친구는 나와 우리 청춘의 한조각을 공유하고 있었고 나는 그 조각을 그 친구와 함께 공유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내 삶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안에 그 친구를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와 한 조각 인연이라도 있다면 소중하게 공유된 기억이 있다면 그 인연이 누구라 해도 그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연락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우기도 싫어서 그 동안 내 전화기 메모리 한켠을 채웠던 이름들, 먼저 연락할 의지도 없었지만 지울 용기도 없었던 나는 그냥 외로워지기 싫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그들을 내 전화기안에 데리고 다니며 그들을 이용했던건 아닐까? 나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 한명 한명.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내 하소연들어주는 역할, 내가 부탁을 할 만한 창구, 내가 필요할때 연락하는 의료상식Q&A기능으로 보는 내 못된 이기심이 아침 안개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어 내 시야를 가린것을 이제야 알것 같았다. 눈 먼 내 이기심으로 그 친구를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안하다 친구야. 네 덕분에 인연을 마무리하는 두려움을 벗어던져야 하는 것이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맙다 친구야. 이제 외로워질 준비를 할께. 주변에 사람을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내가 맺은 인연을 놓아주는 것으로 내 마음에 가득찬 욕심이란 안개를 걷어내려 한다. 나는 모든 인연에는 수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아름다운 퇴장이란 말을 이제는 알것 같다. 이제 비행기 내릴때가 되었다. 미국에 도착하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