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시리즈] 조기은퇴의 허상 (개인 뻘글 조심)

개골개골 2022.02.01 08:03:15

(Feb. 1. 2022 Update)

달아주신 댓글들 빠지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격려와 의견 그리고 자신의 경험담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뻘글에 다시 대댓글 하나씩 달기도 너무 뻘쭘해서 이렇게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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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까 말까 몇 년을 망설였는데, 오늘 이왕 발권 관련 질문 2개 하려 마일모아 켠 김에 다시 한 번 용기내서 집필 해봅니다.)

 

이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왜 제가 이제껏 은퇴관련 글쓰기를 망설였냐 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오래된 마일모아 회원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금융이나 재테크 관련 이야기를 곧 잘 쓰고 답변도 많이 달고 그러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돈 관련 이야기는 마일모아 본연의 기능이 아니고 (물론 마일모아님은 뻘글에서 정보난다고 많이 용기를 주시지만요), 많이 민감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토픽이고, 그렇다고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고...

 

가장 결정적으로 "어떻게든 마일 많이 모아서 비지니스 한 번 타보자"는 열정만 있으면 대부분 성취할 수 있는 골이지만 "열심히 모으면 은퇴할 수 있어요"는 정말 모든 분들의 경제적 상황, 가족 상황, 나이, 꿈꾸는 이상적인 은퇴가 다 다르므로, 결국은 개인의 매우 주관적인 관점만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더 불특적 다수가 읽는 게시판에 쓰기 망설여지고, 오프라인에서 절 아는 분이 꽤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끄적이는 것도 부담스럽고요.

 

그럼 왜 이제와서 이걸 쓰려고 하냐라고 물으신다면... 역시 그래도 그간 도움받았던 마일모아에서 한번은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었던 문제이고, 그리고 저도 이 문제 때문에 판데믹 동안 계속 스트레스 받았던 부분이라 여기서 한풀이 좀 하고 싶어서요.

 

당부 드리고 싶은 말

 

이 주제는 정말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의미가 천차만별입니다. 정답이 있지도 않아요. 숫자계산이나 세부 방법으로 들어가면 샛길로 들어갈 수 있는 방향이 백가지도 넘어요. 그래서 이 글은 그냥 개골개골은 이런식으로 생각하는구나 정도로 읽어 넘겨주시지, "아니야, 나의 은퇴는 이런게 아니야", "이것도 고려해야지 너무 단순하게 접근한거 아냐?" 등의 접근은 삼가해주셨으면 합니다. 

 

은퇴를 위한 전제조건 - 자산

 

일단은 일을 안해도 내가 원하는 수준의 삶을 살 수 있는 자본력이 있어야되겠죠? 그래서 요즘 한참 유행하는 FIRE에서도 Financial Independence가 먼저 나오기도 하구요 (물론 약자로 좋게 만들려고 그랬겠지만요). 그래서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라고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 같습니다.

 

가진자산 > 일년예상생활비 * 30~35배

 

통계적 증명은 Trinity Study와 Safe-Withdrawral Rate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만,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만 깊게 파고들어가도 이야기가 끝없이 나올 토픽입니다. 모든 자잘한 변수 다 빼고 나면 결국은 "내가 일년에 얼마나 쓸까?"가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예를들면 "난 은퇴해도 친구들 다 살고 있는 맨하탄/베이지역/시애틀에 살면서, 일년에 2번은 꼭 해외여행 다녀오고, 차도 3년마다 새 포르쉐를 사야되"라고 하면 일년 생활비 30만불해서 천만불이 있어야 은퇴할 수 있는거구요. 그냥 적당한 곳에서 적당한 취미생활하면서 보낸다면 그보다 수배 적은 돈으로 당연히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거구요. 어느정도너무 돈에 쪼들리지 않는 생활비라는 건 있겠지만, 어느정도 럭셔리가 내가 원하는 은퇴인가라는 부분은 정말로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없습니다.

 

이 수식에서 중요한 부분은, 제일 중요한 변수인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실 나이가 되서 할 수 없이 은퇴하시는 분들을 보면 가진 자산과 연금에 맞춰서 생활비를 맞추시므로 많은 분들이 반강제적으로 실천하시고 있는 부분이구요.

 

나는 왜 은퇴를 못하나?

 

미국에 와서 10년 넘게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민 초기에 생각했던 은퇴를 위한 자산 수준에 2020년 판데믹 들어갈때즈음 도달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생활비" 변수는 사람마다 다르고 저희 가족은 매우 저렴하게 사는 편입니다 ㅋㅋㅋ) 지금은 그보다 자산이 좀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기은퇴(FIRE)를 바라보며 지난 10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달려 왔는데, 여전히 하던 일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 이상 "왜 나는 은퇴할 수 없나"라는 스트레스로 너무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매우 배부른 투정임을요. 하지만 그렇게 추구하던 목표를 겨우 달성했는데도 내 삶에서 바뀐것 하나도 없다는 무력감은 매우 극복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아직도 답은 다 알지 못하지만 몇 가지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돈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돈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필요조건임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돈은 Life Style을 바꾸고 큰 인생의 결정을 하기위한 충분조건은 절대 아닙니다. 은퇴의 결정은 물론 돈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의 큰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은 수십년을 해오던 루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퇴는 할수있으니 하는게 아니고 해야하니까 하는거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야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사회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정년이라는 반강제적인 이유가 있을꺼구요. 그 외에도 지금하고 있는 일이 너무싫어서,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인생의 다른 목표를 찾으려고 등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죠.

 

나를 가로막는 것들

 

저의 문제는 아마도 FIRE라는 유행, 그리고 대부분 "어떻게 Financially Independent 할 수 있냐"에 초점을 맞춘 차고 넘치는 블로거와 유튜버에 매몰되어서 진정으로 내가 은퇴를 원하는지, 원한다면 무엇을 이루려려고 하는지... 등의 나와 내 가족의 Life Style을 완전히 바꿔야 된다는 각오 없이, 그저 "돈 많이 모아서 은퇴해야지"라는 매우 얄팍한 목표에만 매달려 왔다는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목표했던 FI 지점에 도달했을 때 은퇴를 망설이게 했던 몇 가지 구체적인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a. 올챙이는 아직도 6학년
올챙이를 보딩스쿨에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여전히 나의 거주와 휴가의 자유는 학교 스케쥴에 얽매여 있습니다. FIRE하신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보니 이 경우 아이를 홈스쿨링으로 가르치고 거주의 자유를 얻는다는 분이 많으신데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아이를 케어할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하던시간을 아이를 교육하는 시간으로 바꾸면 이게 내가 원하던 은퇴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b. 적당히 일하면 돈 주는 회사
앞에서 "생활비"가 은퇴시 필요 자산을 계산할 때 가장 큰 변수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건 당연히 개인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이 내가 만족할만한 생활비는 자산이 쌓일 수록 기준이 점점 올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들면 이런 사고 방식이 생깁니다. "내가 1년만 더 일해서 추가로 저축을하면, 이제는 자동차를 10년 고쳐타는게 아니고 3년마다 리스할 수 있겠네" 같은요. 다니고 있는 직장이 정말로 때려칠 정도로 싫지 않으면 이 유혹을 견디기 너무 어렵습니다.
 
c. 은퇴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 처럼 저는 여행도 매우 좋아하고, 요즘에는 등산에도 꽤 재미를 붙였습니다. 물론 은퇴를 하지 않으면 1년간 세계일주 이런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웬만한 여행이나 등산은 지금도 적당히 즐기고 있습니다. 꼭 은퇴를 해야만 이걸 할 수 있다. 혹은 은퇴를 하면 꼭 이걸 해보고 싶다. 이런게 저는 없는거 같습니다.
 
저는 은퇴를 하게 되면 "기회가 없는 아이들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매우 막연한 환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의지는 충분한지를 물어보신다면 글쌔요. 막연히 선망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없고 막상 닥치면 하려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너는 뭘 할껀데?
 
일단 너무 정체되어 있는 것이 싫고 + 본격적으로 회사 일을 줄이고 싶어서, 몇 달 전에 포스팅한 것과 같이 콜로라도로의 이주를 진행중에 있습니다. 콜로라도로 주 거주지를 옮기면서 완전재택근무를 신청할 생각이고, 아마 일하는 것도 주5일에서 4일, 혹은 더 나아가면 3일까지로 줄여볼 생각입니다. 겁쟁이라서 하루아침에 삶의 루틴이 바뀌는게 무서우니 조금씩이라도 의미있는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지금으로써는 은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올챙이가 성인이 될때까지는 취할 수 있는 옵션이 많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마 올챙이가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고등학교 졸업 1-2년 남겨두고 완전 은퇴를 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주변에 친한분들 중에는 아무도 이 길을 이 나이에 가본 분이 없으시기에 한걸음 한걸음이 많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1년간의 고뇌로 확실히 배운것은, 은퇴는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해야하기 때문에 한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주어신 시간을 이 "해야하는 이유"를 찾는데 집중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