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논픽션 - 사랑이야기 #1 (feat by. 요리대장님)

shilph 2020.05.20 18:27:56

"담배 좀 그만 펴. 서준이도 아빠 오면 담배 냄새 나는지 안나는지 보는거 같더만. 아니면 쥴로 바꾸던가."

쓰레기통을 내놓으러 간다고 하고 뒤적뒤적 잠바 주머니를 뒤지는 내 모습을 보고 오래간만에 한마디를 한다. 물론 그대로 뒤돌아 보면 내가 지는걸 테지만.

"일 주일에 한갑도 채 못 피는거 잘 알면서 그러긴. 애들도 자고 말야. 라이터도 안 쓰면 고장나. 큰애 생일도 얼마 안남았는데 라이터 고장내면 안되잖아"

뒤통수가 따가운건 한숨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툴툴거리면서도 쓴웃음을 짓고 있을 모습이 안보고도 보여서인지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은듯 어깨위로 손을 휙휙 흔들면서 슬리퍼를 신는다.

 

슬슬 봄이 오련만 슬리퍼를 신은 발은 차갑기만 하다. 툴레툴레 쓰레기통을 내놓고, 마지막 남은 한 개피를 입에 문 뒤 쓰레기통에 버린다. 앗차, 재활용품인걸 잊었구만.

아직 종종 재활용품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한다. 마음속 한구석은 귀찮아서, 다른 한구석은 아직 나이를 채 먹지 못한 나의 모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40도 안된 나이지만, 거울을 보면 슬슬 흰머리도 보이고 턱수염도 허연 것이 올라오니 늙기는 늙은건가? 

근데 그러면 뭐하나. 내 모래시계는 열심히 돌아가지만, 종종 건전지가 다 된 시계처럼 한 구석에 멈춘 시계바늘처럼 멈춰있는 기억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지우지 못한 이메일도 그대로니 말이다.

 

잘 살기는 하는건지 원...

 

마지막 메일이 온게 서준이 백일 즈음이니 벌써 돌도 지났건만 아직도 답장 하나 없으니 말이다. 죽은건지 살은건지.

그래도 처음 만났던 그때도 꿋꿋이 잘 살고 있었으니 잘 살고 있겠지... 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를 처음 만난건 벌써 10년 좀 넘은 이야기다. 나도 아직 20대였던 젊었던 때 말이다.

친구따라 강남가듯 군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떠났다. 20대 초의 젊은 혈기에 유학을 왔고, 그래도 IMF 도 이겨내고 부모님도 중산층은 됐기에 유학을 올 수 있었다. 되먹지도 않은 콩글리쉬로 무장하고 영어 공부 좀 하다가, 잘 배우면 미국 회사에 취업도 하고 미국에 계속 머물 수 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따라서 컴퓨터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프로그래밍을 하겠다고 생쑈를 했었다. 졸업은 그럭저럭 적당한 점수였고, 취업은 커녕 인턴도 제대로 못 따던 나였지만, 그놈의 미국물 때문인지, 한국의 여러가지 소문이 무서워선지, 무작정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4년제는 그래도 쉬웠지만,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한 단계 더 올라가려고 하니, 매일매일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다가 서브프라임이 터지고 아버지가 계시던 직장도 타격이 있었다. 환율도 그랬고. 당연히 내게 쥐어지는 돈도 더 줄었고. 학교도 여러모로 난리였기에, 하루하루가 은행잔고와의 혈투였다. 그냥 다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니, 미국도 난리인 상황에 한국으로 돌아와봐야 더 힘들다는 친구의 충고로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학교에서 준비하던 프로젝트도 잘 풀리지 않고, 영어는 계속 내 발목을 잡고, 교수님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니까. 담배도 정말 아껴서 피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점점 꺼리게 되었다. 그때 다른 유학생들 만나봐야 서로 푸념에 바빴으니까. 술값도 채 못 마련하면서 술이나 쳐먹자고 하는 사람들이랑 만나서 뭐할까.

 

그 와중에 그나마 나한테 위안이 있었다면 내가 좋아하던 카페의 모카였다. 내가 있던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페였는데, 한국인 사장님이 하시던 카페였다. 그곳을 꽤 오랫동안 다녔었다. 사실 그리 자주 마신 것도 아니지만,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조금 멍때리다가 머리를 식히는게 어느 순간 일과가 되었다. 사장님도 친절하셔서 단골 유학생이라고 잘 봐주시기도 했고, 반찬이라고 먹으라면서 주시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카페에서 일하던 알바생이 그만두고 사장님이 늦게까지 일을 하시다가 허리를 조금 삐끗하셔서, 잠시 도와드린다는게 예상치 못한 알바로 이어졌다. 뭐 나도 주머니 상황이 아직 좋지 않던 때라서 그러겠다고 했지만. 다행이도 사장님도 잘 봐주셔서 손님이 없을 때는 공부를 하는 조건으로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도서관으로 갔다가 카페로 가면 5시. 새벽까지 일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1시 반. 밀린 공부와 숙제를 하고 잠들면 3시? 쪽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서 학교로 가는 도돌이표 같은 생활이었다. 주말에도 일을 하거나, 숙제를 하거나, 밀린 공부를 하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부모님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야 했다.

그게 내 삶의 전부 였다. 남자들만 드글거리는 컴공과에서 연애 상대를 찾는 것도 불가능했고, 공부와 일에 치여서 누구를 만날 시간도 없었다. 가끔 다른 유학생과 하는 이야기로는 어느 과 누구가 백인 여자랑 사귀었다느니, 어느 교회에 새로 온 유학생이 예쁘다느니 하는 이야기였지만, 나한테는 그냥 하늘의 뜬구름 같은 이야기 였다. 연애는 무슨... 잠이나 좀 잤으면... 하던 나날이었다.

 

그래도 반년을 넘게 일을 하니 나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몸은 피곤했지만 적어도 손님 얼굴을 기억할 즈음이 되었을 때, 한 손님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언제 처음 오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카페에 한 여자가 오기 시작했다. 나이는 20대 중반? 후반? 대충 내 나이 즈음 같았다. 한국말은 한번도 쓰지 않았지만, 분명 한국 사람인듯 했다. 뭐 한국 손님도 몇 명 있었으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다른 유학생이 말하던 근처 교회에 새로 온 예쁘다는 유학생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여름에 오는 유학생도 없을테고. 그렇게 몇 번 오던 손님이었다. 

그 여자는 혼자서 주로 왔지만, 한달에 한두번은 남자와 같이 왔다. 어딜봐도 40대 중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였다. 좋은 차를 타고 카페 밖 주차장에 세워두고, 그 여자와 함께 내렸다. 그러면 그 여자가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카페 구석에 앉아서 무언가 한참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심각한 얼굴로. 다른 손님이 없을 떄는 무슨 이야기일까 하고 책을 펴놓고 앉아서는 귀를 세웠지만, 뭐라고 작게 이야기하는 소리만 들릴뿐 딱히 들리는 말은 없었다. 

 

아, 그 여자의 목소리는 참 예뻤다. 종종 이야기 도중에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퍼질 정도로 말이다.

머리를 숙이고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적으면서 귀뒤로 넘기는 약간 긴 머리도 참 부드러워 보였다.

팔을 들고 옷깃을 만지면서 무언가 남자에게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종종 뿌리던 향수 냄새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왔다가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본 적도 있던거 같다.

 

그러던 어느날인가부터 그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 남자도.

원조교제 였을까? 아니면 불륜인가? 그 남자의 부인이 알아차린걸까? 아니면 그 여자가 한국으로 돌아간걸까? 여행이라면 두달 넘게 보이지 않을리 없겠지? 아니면 여행을 갔다가 사고가 있었나?

이런 저런 생각에 거의 잠도 못자고 학교로 돌아가던 날도 점점 늘어만가던 어느 늦은 가을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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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한동안 급하게 처리하던 일을 한단락 해서 슥슥 써봅니다. 역시 월급루판

 

위 내용은 @요리대장 님의 수필 이자 자서전 논픽션 사랑이야기에 상상력만 더해서 적는 것이니 요리대장님의 과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 이야기는 요리대장님께 여쭤보세요 실제 이야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 같네요. 

 

일단 #1 부분입니다. 다음 편은 언제 쓸지 모르지만, 나중에 또 머리가 복잡해지고 일하기 싫어지면 하나씩 써보기로 하지요 ㅇㅅㅇ)/

왠지 장기 프로젝트가 될거 같네요 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