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표류기 2

포도씨 2021.04.28 10:23:05

 

(완결) 나의 미국표류기

 

지난번에 이야기의 그 후 이야기랄까요? 

 

 

 

<1편>

 

밥은 먹었니? 12학년 씨니어 특유의 뾰루퉁한 얼굴로 내 말은 간단히 씹어주신다. 그래 여기저기 미국 전국에 지원해 놓은 대학들, 에세이 준비하랴 학교수업하랴 얼마나 마음고생이겠냐. 오늘도 내가 참아야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잔소리 한마디를 삼키며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길에 장모님의 따님을 닮은 그녀를 태우고 고등학교에 모셔다 드린다. 아빠 앨리 알지? 걔는 이번에 에머리 붙었데. 인스타에 억셉레러사진올려서 난리났어. 어 그래 축하해줘라. 너도 곧 좋은데 갈수 있을꺼야. 어 아빠 바이.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 다다를 무렵 아이폰이 부드러운 진동이 곁들여진 상큼한 알람음으로 아침에 전사원이 참석하는 회의가 있을 것임을 알려주었다. 갑자기 무슨일이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회의에 참석하러 대회의실로 향하였다. 모두들 웃고는 있었지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회사의 발전과 고락을 함께 해준 여러분께 정말 감사해요. 나는 이번 발표가 회사의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은 봉투를 하나씩 받으실 거예요. 만약 봉투안의 카드에 푸른 스티커가 붙어 있다면 그랜드캐년회의실로 가시고 녹색 스티커가 붙어 있다면 여기에 머무르시면 됩니다. CEO가 말한 후 퇴장했다. 내 이름이 씌어 전해진 봉투안에는 녹색스티커가 붙은 자그마한 카드가 들어 있었고 그 동안 회사의 발전을 위한 당신의 노력에 감사하다는 CEO의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O월 O일이 당신의 공식적 마지막 근무일이며 향후 몇일간 회사는 재취업을 도와주겠다는 문서, 실업수당 청구안내문서, 보험의 연장에 관한 안내문서, state법에 따른 실업과 재취업안내문 등이 들어 있었다. 몇몇은 회의실을 떠나며 나를 안고 울었고 몇몇은 진한 포옹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HR의 Head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브리핑을 한후 질의에 대한 응답을 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게 회의실 안에 머무른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직장동료가 아닌 사람들의 울분을 들어주었다. 두번의 layoff를 운좋게 벼텨낸 나에게 녹색스티커가 붙은 그 카드는 이제는 나의 운이 다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내 사무실로 돌아와서 무슨 생각에선지 내 화분과 모니터앞에 걸터 앉아 셀카를 한장 찍었다. 랩탑을 반납하고 개인물품을 주섬주섬 챙겨 종이박스에 담아 나오려다 아쉬움에 복도에 멈춰섰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싶어 내 보스의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세상 좁으니 언젠가 다시 볼거라며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젠든지 말하라는 내 보스의 눈은 나를 서둘러 돌려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영어가 서툴러도 그정도는 안다구. 이제 어딜갈까? 회사앞 시큐리티 한테 애써 미소로 마지막 인사를 한후 일단 집으로 향했다. 아직은 익숙치 않은 시간의 퇴근길은 한산했다. 커피를 한잔 내리고 그렇게 카우치에 앉아 와이프와 함께 씁쓸한 커피를 마셨다. 민감한 애들이 걱정할수도 있을까봐 당분간 알리지는 않기로 했다.

 

이제 더이상 출근길은 아니게 되었지만 평소처럼 12학년짜리를 모시고 학교에 내려줄 찰나 그녀가 물었다. 아빠 회사안가? 슬리퍼 신고오면 어떡해. 아하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한 그냘저녁, 2년반만인가 3년만에 갑자기 딸이 나를 부둥켜 껴안았다. 그리고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빠 나 OOO대학 합격했어. 우와 그래? 장하구나 우리딸. 대단해. 대단해. 장학금도 받어? 목표로 한 대학에 합격한 딸을 보는 부모로서 기쁘다가도 마음 한켠에 튜이션이 얼마였는지 기억해내려 애쓰고 지원해야할 금액을 계산하고 있는 내가 약간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 딸의 새출발을 여는 기쁨을 순수하게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할 처지의 내가 딸에게 조금은 미안했다.  

 

 

 

<2편>

 

한국에서는 신천지신도들의 전국적인 코로나확진소식이 국민의 공분을 사며 연일 뉴스를 장식할 무렵이었다. 그래도 미국은 별 다른 기미가 없음에 내심 안도하고 있었지만 곧 미국에도 코로나의 성난 파도가 들이칠 것을 직감했다. 우선 코스코에 가서 쌀이며 물, 라면을 좀 사두고 CVS같은 pharmacy store에서 IPA와 세니타이져 같은 개인위생물품과 마스크와 라텍스 글러브 등을 사두었다. 마스크를 못구해서 아우성중인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마스크를 급행으로 보내드렸으나 미국에서 구입한 마스크는 부실해서 부모님은 썩 반가워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페이스타임을 통해 통화하면서 밖에는 나가지 마시고 건강에 유념하시라 당부드렸으나 마음 한구석은 늘 불안감의 차지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별로 해 드릴 만한 일이 없어 내 자신이 더욱 더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별일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애들도 학교 잘다니고 이제 곧 큰 애는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할거구요. 애들을 더이상 속일수는 없어서 아빠는 이제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부모님께는 혹시나 걱정하실까 실직한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몇달이 지났을까? 강건너 불구경하던 미국에도 반갑지는 않았지만 역시 예상대로 미국쪽으로도 코로나가 상륙하고 캘리포니아와 뉴욕의 확진자숫자가 한국으로 전해지자 부모님은 오히려 미국에 있는 우리가족을 걱정해 주셨다. 정기적으로 다니는 병원에 출입이 엄격해져서 불편해졌다고 말씀하시면서도 회사갈때 꼭 쓰고 다니라며 해외 체류가족 1인당 허용되는 수만큼 그 귀한 한국산 KF94 마스크를 보내주셨다. 

 

실업수당으로 근근히 꾸려가는 와중에도 나는 여러군데 그리고 꾸준히 지원서를 넣었다. 생각지도 못한곳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지만 가장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layoff의 경험을 함께 한 동료중에 먼저 취업한 분들의 추천도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몇몇의 리쿠르터들의 전화를 받아 스크리닝을 거쳐 매니저와 간단한 전화 인터뷰 후에 패널들과 온사이트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열심히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도중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회사내부사정으로 온사이트 인터뷰가 힘들겠다는 말을 전했다. 아직 CDC의 명확한 지침이 없어 회사의 인터뷰는 조만간 재개되어 진행되긴 하겠지만 당분간 모든 캔디데잇의 온사이트 인터뷰는 홀드 방침이며 인터뷰 재개를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3월 말쯤 미국의 다우와 S&P, 나스닥의 주가가 폭락하며 세상이 곧 COVID-19로 망할것처럼 모든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하루의 반을 묵묵히 휴대폰을 뒤적이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아웃룩 인박스를 애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한달여 지났을까 재개를 기다리라던 어떤 인터뷰는 캔슬되기도 하고, 어떤 인터뷰는 virtual conference로 진행이 된다고 알려왔다. 조금은 생소하고 그리고 나같은 non-native speaker에게는 오디언스의 분위기를 읽을 수 없으니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인터뷰어들의 반응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고 그리고 그렇게 몇 차례의 기회를 보내고 나니 리쿠르터들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경기나 경제는 좋지 않지만 자산가격은 꾸준히 오른다는 이상한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채 했으나 걱정과 불안은 내 안에서 점점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낮시간에 회사 안나가도 되냐는 어머니의 걱정에 나는 애써 웃으면서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서 오히려 더 좋아졌다고 둘러 대었다.

 

 

 

<3편>

 

코로나때문에 계속 집에만 계셔서 그런지 마음이 쇠약해지셔서 그런지 아버지의 만성신부전은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에 합병증을 불러오고 있었다. 집에 계시는 날보다 병원에 계신 날이 더 많아질 즈음에 병상에서 각종 검사와 그 결과 기다리던 아버지는 무료하셨는지 가끔 내게 카톡을 보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장수비결이라든지, 트롯트 유행가 공연영상, 서커스 공연영상, 건강기원 안부인사사진, 아침인사 움직이는 gif, 등 그저 그런 내용의 카톡을 꾸준히 보내주셨다. 아버지 힘내세요. 봄이 오고 날 따뜻해져서 밖으로 자주 나가게 되면 건강도 더 좋아지실거예요. 다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하세요. 지난 몇년간 혈액 투석을 받아오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는 그저 매 겨울마다 지나가는 병치레라 생각했다. 

 

그날도 오전에 몇개 회사의 커리어사이트에서 잡오프닝을 검색하고 몇몇은 추린 후에 그에 걸맞게 레쥬메를 편집하고 새로운 항목을 찾아 추가하고 있었다. 커버레터를 쓰면서 나름 고민하는 중에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며칠전 아버지가 혈액투석중에 또 출혈이 있어 재입원을 권유한터라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버지 가시는길 마지막 말이라도 남기라 하셨다. 아버지는 내 음성을 들으셨을지 지금도 모르겠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급히 영사관에 연락하여 한국에 입국할때 격리면제서를 신청하고 항공편을 예약하고 근처병원에 Covid-19 검사를 하고 certificate를 발급받아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은 입국수속으로 부산했다. 나는 다른 해외체류자들과 함께 따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격리시설에서 재검사를 하고 음성결과를 확인받은 후에 방역택시를 타고 이동하여 장례식 마지막날에 사진으로나마 아버지를 뵐수 있었다. 그윽한 향내 가득 채운 곳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어 영정사진을 잘못봤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에게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컷 울 수 있었다. 엄마가 안아주어 더 크게 울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내드리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날, 엄마에게 그동안 많이 울었으니 웃으면서 보내달라고 했고 엄마는 울면서 환하게 웃었다.

 

 

 

<4편>

 

실업수당도 이제 끊어졌다.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고 인터뷰는 몇달째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그럴수록 나의 인터뷰 스킬은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회사의 hiring process에 익숙해져 갔고 recruiter screening, manager talk, video interview, scientific webinar, on-line conference도 할만해졌다. 연락두절되엇던 두어 군데의 회사에서는 다시 프로세스를 이어 나가기도 했고, 떨어진 회사에는 다시 연락하여 feedback을 받으려 노력도 했다. 드디어 두 군데의 회사에서 verbal offer를 받고 둘중에 신중히 고른 후에 나름 Top10 pharma인 회사에 다닐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음 같은것을 얻었다. 아버지를 잃은 이후로 나는 더욱 의젓해졌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 아버지도 이런 나를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나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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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족을 위해 응원의 댓글 주신 여러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민자의 쉽지 않은 삶의 단편들에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신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분들 덕분에 큰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informal하긴 하지만 hang in there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안수정등(岸樹井藤)이 생각났습니다.
 
해인사 안수정등도.jpg

<해인사 안수정등도>

 
아무리 힘들고 지치고 어려워도 꿀 한방울에 혀내미는 것이 인생아닌가 합니다.
We just have to hang in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