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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인생 계획에도 없었던 좌충우돌 미국에서의 20년 삶 3

용벅 | 2023.07.16 01:42:40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평소에 연락도 잘 오지 않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셀폰이 울리더니 힘이 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XX야 잘 지내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일상생활의 대화로 마무리를 짓고 끊었다. 

항상 밝고 우렁차시던 엄마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힘이 없게 느껴졌다. 

 

그런데, 몇시간후에 동생한테서 또 연락이 온다. 평소에 전화통화도 잘 하지 않는 녀석인데, 연락이 오는걸 보니, "오늘 작정하고 나한테 안부전화 하는 날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받았다.  또 다시 일상적인 안부 주고받는 대화로 이어가다가 끊을때 정도되니, 동생왈 "형 엄마 갑상선 암에 걸리셨다. 수술 몇월몇일에

잡아놨으니, 좀 들어오는게 어때?....." 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고2때, 동생이 중3때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집의 형편이 180도가 변해 버렸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직장 생활 하실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고, 먹고 싶은거 사고싶은거 다 사주시던 엄마가 아버지가 돌아가신후로는 반대로 변해 버린것이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안됬었지만, 우리 형제의 사춘기 시절과 겹쳐 너무나 힘들게 해드린게 참 죄송스럽다. 

 

동부로 이사온지 6개월만에 또 정든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했다. 학교에 말하고, 뉴욕 친구들, YMCA 친구들, 학교친구들 등등 또 다시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중 노래방 친구들이 가장 따뜻했고 지금까지 연락하는 형이 한명이 있다. 내가 택시를 타고 문을 닫기 전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던 형....

곧바로 엘에이로 날아가서 친구네 집에서 하루정도 머무른 다음에 바로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했더니, 한국에 있는 퍠션관련 학교를 소개시켜주었고, 엄마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후에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니 키는 작고 덩치도 작으셨지만 항상 강인하고 듬직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가족들과 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수술을 무사히 끝내게 해달라고 응원하고 기도했다. 몇시간후에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잘 됐다는 결과를 통보 받았고

모두들 안심하듯 한숨을 쉬며 기뻐했던게 생각이 난다. 

 

가족과의 상의 끝에 결국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그녀에게도 알렸다. 한국에서의 3주동안의 시간은 너무나 답답했고, 많이 아팠고 (감기, 몸살, 알러지 등등) 힘들었었다. 뉴욕에서 살다가 왔음에도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3주의 기간이 3개월처럼 느껴졌었던거 같다. 

 

가족들을 뒤로 하고 다시 엘에이 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처음 입국하던떄랑 마음가짐이 달랐다. 약간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착잡한 마음과 부담감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만감이 교차했다. 엘에이에서 친하게 지냈었던 동생이 자기 아파트 방이 하나 남는다면서 나와 같이 지낼것을 제안했었다. 그 친구의

어머님이 제안해 주셨고, 모든사실을 알고 계신 친구 어머님은 돈도 받지 않으셨었다. 몇일전 옛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전화 드렸더니 너무나 반가워 하시고, 결혼도 하고 애기도 있다고 하니 자랑스럽다며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화넘어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나 신이나고 흥분되게 들렸다. 

당시에 나는 가진 돈도 없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일단 감사하다며 승낙을 했고, 그렇게 친구집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엘에이에 다시 들어온후 얼마 지나지 않아 Santa Monica College 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차가 없었기에 코리아타운에서 산타모니카 그리고 알바하던곳 (South Central) 의 동선을 아주 잘 짜야만 시간분배를 잘하고 수업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알바 시간을 잘 맞춰 갈수가 있었다. 

알바와 수업이 함께 있던 날은 새벽부터 나가서 밤늦게 되어서야 들어올수 있었다. 당시에 알바하는곳에 버스를 두번타야 갈수 있었고, 알바가 끝나고 학교를 갈려면 또 버스를 두번 타야 갈수가 있엇다. 그리고, 수업 후 집에 돌아올때 한번, 총 버스를 5번을 타야 하루가 끝났다. 

아무리 20대중반 건강한 나이라고 해도 힘든 스케쥴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피곤이 쌓여서 수업을 점점 빼먹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일을 더 해야하는 상황이었기에, 둘중에 하나라도 포기할수 없어서 간신히 버티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다시 Liquor Store 알바 첫날로 돌아가보면,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 일하게 된 Liquor Store였다. 

위치는 90년대 초반에 한인폭동이 일어났었던 근처였던거 같았다. 이 동네 역시 흑인동네였고 그중 Crip 이라는 Gang 의 Territory 었다. 흑인 동네에 가면 거의 있는 길 이름중 하나인 MLK 바로 옆이었다. 오픈조였던 나는 한국인 사장님 밑에서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같이 일하는 친구들도 흑인이었고, 캐러비안에 속한 나라인 Belize 출신 친구들도 같이 일했었다. Register 앞에는 5cm 정도되는 방탄유리가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설치되어 있었고, 중간의 문도 두꺼운 철문, 게다가 Register 아래에는 권총도 있었다.  당시 오픈조 인원은 Cash register 두명, 그리고 Stock 만 전문으로 하는 친구 이렇게 3명이 한조였다. 

 

뉴져지에서 갈고 닦앗던 6개월의 흑인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있게 첫손님을 받았지만, 손님이 올때마다 무슨소리를 하는건지 당췌 알아듣지 못하고 멘붕이 와버렸다....흑인영어는 그나마 자신있다고 생각했었던 나였는데, 나 자신에 많이 실망했지만, 같이 일하는 흑인 친구가 있었기에 기죽지 않고 모르면 항상 물어보면서 일을 했으며, 학교생활과 알바 생활 그리고 친구들과의 운동 등등 그렇게 또 다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가끔 마감하는 날 일 끝난후 같이 일하는 Stock 하는 친구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는 했었는데, 밤에 일하는 날엔 마감을 10시에 하고 문을닫고 버스정류장에서 30분을 기다려야만 버스가 오곤 했엇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었는데, 적응되고 나니 담담해지고, 가끔 그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면서 보았던 밤하늘에 떠 있었던 별 보던 기억이 나곤 한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 일하며 생활하려고 미국에 다시 온걸까?" 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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