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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정보-은퇴]
펀드 깎던 노인

Bard | 2024.03.13 11:17:05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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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전 일이다. 남는 여윳돈으로 펀드를 살려고 했던 때였다. 회사 맞은편 뱅가드라는 간판에 펀드 깎는 노인이 있었다. 펀드 하나 사려고 부탁을 했다. 펀드 보수를 굉장히 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더 비싸게 받아도 되지 않소?"

했더니,

 

"인덱스 따라가는 건데 더 받아야 되겠수? 너무 싸구려 같이 보이면 다른데 가시오"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 못하고 잘 만들어나 달라고 했다. 그는 잠자코 주식을 하나씩 고르기만 하였다. 처음에는 빨리 고르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고르고 있었다. 주식 그 만큼 넣었으면 대충 분산 되었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장 마감할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분산 안해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인덱스를 그대로 추종해야지 인덱스 펀드지, 주식 몇개 넣는다고 추종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투자할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고른단 말이요?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장 마감한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딴 회사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어차피 장은 마감될거 같아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만들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오차만 커지고 제대로 분산이 안된다니까. 펀드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만들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만들 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시가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펀드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더 다 돼 있던 펀드였다. 투자설명서에 VTSAX 라고 적혀져 있었다.

 

장 마감이 되어 다음 날 매수를 해야 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월가 황소동상 x랄을 바라보고 섰다.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장인다워 보였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펀드를 보여줬더니 아내는 맘에 든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가지고 있던 대형주 펀드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보니, CRSP Total Stock Index 를 꼼꼼하게 따라가도록 만들어 져서 추적오차가 적으며, 펀드매니저가 임의로 팔 수 없게 되어 턴오버율도 2% 가량으로 낮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잘 알면 너가 사지 왜 바쁜 나에게 부탁하냐고 대들었더니 등짝 얻어맞고 한 소리 들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렸고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 미안했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위스키에 비프저키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가 방문하는 길로 노인을 찾았더니 그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커스터머 서비스로 전화를 걸었더니 인도 억양을 가진 사람이 전화를 받으면서 해당 부서가 없어졌다고 했다. 뱅가드에서 서비스부서를 통째로 날려서 인포시스로 하청을 준 것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며 월가 황소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 노인이 떠올랐다. 열심히 펀드를 깎다가 황소 x랄을 바라보던 거룩한 노인의 모습. 나는 무심코 존 보글의 募屯株式(모둔주식) 所有下螺(소유하라)는 말을 읆조렸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코인을 하고 있었다. 화성에 간다고 계좌를 보며 들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젊었을 때 얼마되지 않는 돈 모아서 한주 두주 모을 때 생각이 난다. 그러고보니 뱅가드 로그인 해본지도 오래되었다. 문득 20년전 펀드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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