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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여행기]
어쩌다 뉴욕 - 마지막

사리 | 2014.10.07 20:05:01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어쩌다 뉴욕 #7


눈앞에는 새로 지은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있다. 

그리고 방에서 나가 엘리베이터로 나가면 브루클린 다리가 보인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우버를 예약해서 나간다. 

도대체 그렇게 한국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우버가 어떤 것인지… 

첫 이용 고객은 30불 할인해준다길래, 친구와 어차피 같이 공항에 가야하므로

전철이나 우버나 그게 그 가격이었다. 


예약을 누르자마자 바로 호텔 앞으로 차가 한대 왔다. 

사람이 꽤 있었지만 “미스터 리씨죠? 공항까지 가는…”이라며 온다. 

사람이 많이 있어도 상대방이 라스트 네임을 알면 대충 이렇게 인종을 인식하고 오게 된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데

같이 스탠바이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직원이 티켓을 들고 내 앞으로 와선 

“리?”라고 말하며 티켓을 주는 것과 같이… 


그냥 특별한 건 없었다. 

친구의 한번도 본 사촌 동생이 픽업나온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고,

차이점은 그 사람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현금으로 안주고 앱으로 신용카드 결제가 된다는 차이였다. 

근데 걱정은 하나 들었다 - 이게 사고가 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사람이 어떤 보험을 들었는지도 모르고,

일반 승용차 보험으로 영업을 하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이 됐다. 


얼마전 캄보디아에서 친구에게 “우버라고 아냐?”라고 해서 모른다기에 설명했더니 “앵? 나라시 택시네?”란다. 

도쿄에서 오래 살았던 이 친구가 설명하길,

도쿄에는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많은데 이들이 주로 외출을 할 때 “나라시 택시”라는 걸 타고 다닌다고 한다. 

주로 합법적 체류자가 일반 승용차로 운영하는 불법 택시 같은 것을 한인들은 “나라시 택시”라고 불렀단다. 

나라시 택시를 타는 이점은 일본어를 하지 못해도 이동이 가능하고, 

불법체류자로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데 단속의 위험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요금은 일반 택시보다 더 비싸단다. 


문득 한 택시(?)가 생각났다. 

작년에 LGA에서 내렸을 떄, 인터넷을 검색해서 한국 택시를 타봤었다. 

“어디쪽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단속에 안 걸리게 뒷자리 말고 앞자리로 타세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시키는대로 앞자리는 탔다. 

그땐 단속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뭐가 뭔지 어리둥절 했지만

미터기가 없는 택시를 보며 어렴풋이 이게 무슨 것인지를 알았던 것 같다. 

이 역시 나라시 택시였을 것이다. 

길이 막혔었다. 기사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노름 때문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도망치듯 건너 올 수밖에 없었던 건. 

마지막으로 집까지 날렸을 때는 더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이혼을 하고 딸 아이를 남겨두고 그렇게 몇년전 건너왔고 아직까지 딸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후로 한번도 도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힘든 순간은 손님이 뉴욕 근처에 있는 카지노에 가자고 할 때란다. 

먼 거리라서 돈을 좀 벌 수는 있지만, 생선 앞에서 며칠을 굶은 고양이 같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특히 그 손님이 하루를 통째로 예약해 차를 도박장에 대기 시켜 놓으면 온몸에서 진땀이 난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마음 속에서는 오십불만 하고 올까 백불만 하고 오면 되지 않을까 계속 고민을 하는데,

결국 오십불이 백불이 될 거고 백불이 지금 조금이라도 모아 놓은 돈을 다 갖다 부을 걸 알기에

아예 들어가지 않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가만히 있는 걸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가장 자신에게는 길고 긴, 마음이 가장 힘든 시간이라고 했다. 

양육비도 제대로 보내주지 못하는 아비인지라, 딸에게 전화 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소식은 간간히 전해 듣지만,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려면 대가를 치뤄야 하는데, 아비로서 뭔가를 해줘야 당당하게 연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래도 딸에게 전화라도 하시는 게 어때요? 

전화번호는 알고 있어요. 다만 너무 미안해서 못해요. 못난 아빠니깐. 

하지만 그냥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도 있어요. 

이렇게 나쁜 아빠인데도요? 

아빠한테 원망을 하고 싶으면 그래도 아빠가 직접 그 원망을 들어주는 게 좋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까요? 

사춘기 나이에… 어차피 모든 걸 다해주는 아빠였어도 애들은 대게 화와 짜증을 냈을 거에요. 그걸 받아주는 것도 가끔 부모의 숙명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아직 용기가 없어요. 너무 미안해서… 

너무 늦기 전에… 그래도 아빠가 자기를 잊지 않고 마음에 꼭 담고 있다는 것은 확인시켜 주세요… 하지만 용기 얻겠다고 술먹고 하시면 안될 것 같아요… 


그 아저씨가 전화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뉴욕 어느 골목을 달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도박 때문에 도망치듯 건너왔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린지도 모른다. 

대게 큰 상처라는 것은 입밖으로 꺼내기까지 아주 길고 긴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니깐. 

어쩌면 그 분은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그 얘기를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지금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길에서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99.9% 이상의 확률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

때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생각치도 않게 마음을 털어 놓을 때가 있다. 



우버를 타고 뉴왁 공항으로 가는 길. 

언제부터 이렇게 쏘다녔던 걸까? 

나는 정작 어딜 이렇게 다니는 것보단 그냥 시골 같은 곳에서 짱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데.. 

밥은 사먹는 것보다, 어설프더라도 해먹는 걸 더 좋아하는데… 맛집 따위.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이마를 때린다. 


내 생각에 너는 평생 머리로 먹고 살 것 같은데, 몸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아야해. 

중학교에 들어가자 아부지는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래서 주말에는 정미소 방앗간에서 혹은 잔치집에서 쌀이나 등겨를 나르거나 오붕을 들었었다. 

그 나이에는 소년가장처럼 보일까봐 창피하진 않을까 걱정도 됐었는데 얼마 가진 않았다. 

그렇게 주말을 일해서 돈을 벌면 아부지는 그 만큼 돈을 더 주셨고, 

일당 만원 이만원을 받아오면 결국 내 손엔 이만원 사만원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돈은 혼자 서울로 가서 교보문고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사는데 썼었다. 

덕분에 책 사달라고 돈을 달란 적은 없었다 - 그 나이 때부터 내가 몸으로 번, 특별 보너스가 있는 돈으로 다 산 책이었으니. 

그래서 책을 사는 것은 좀더 힘든 일이었다. 힘들 게 번 돈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사면 안됐었다. 


레닌이 그랬었던가? 인간은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레닌이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러시아 빨갱이 대장”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아부지는 어떻게 이걸 알았을까?

대학 와서 좀 놀랐던 게, 부모가 화이트 칼라이고 자기도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온 경우,

육체 노동에 대해서 지독한 편견과 오해가 있는 것이었다. 

공부를 못했기에, 머리가 나쁘기에… 그리고 육체 노동은 단순하다는… 

직접 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노동 경험과 세계를 판단해버리는 오만을 “머리를 주로 쓰는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여러 종류의 경험을 하지 못하게 하고, 몸을 쓰면서 제 밥벌이도 좀 해보는 경험이 

극히 한정된 중산층의 보호받으면서 자란 한국 아이들은 지독하게도 이런 편견이 모르는 사이에 베어 있다. 

언젠가 대학에서 주점을 했을 때, 다섯명이 앉아서 써빙도 주문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지 상의하고 있는데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사람은 역시,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게 확실했다.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겸손함을 갖기 위해서. 


학기 중에는 그렇게 주말에 주로 정미소에서 일을 했고, 방학 때는 좀 다른 일들을 했었다. 

방학은 말그대로 학업을 놓아버린다는 뜻인데 보충수업하고 자율학습 하는 게 싫다고 하자,

양친은 나를 앉혀 두고 이런 미션을 주었다. 

“일주일동안 나가 살아봐라. 5만원을 줄테니. 매일 밤 어디서 자는지만 전화를 하고”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중학교 1학년 방학 때부터 그렇게 혼자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대게 멀리 있는 친척집을 주로 다녔는데, 숙식이 해결되고 운이 좋으면 용돈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X 친척집에서 Y 친척집으로 가는 사이에 다른 곳도 구경을 시작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은 1) 절에서는 매끼 밥을 공짜로 얻어 먹을 수 있다, 2) 시골 교회에서는 잠을 공짜로 잘 수가 있다 였다. 

그래서 법주사며 관촉사며 이런 저런 산에 있는 절들을 낮에는 구경하고 밤에는 마을에 있는 시골 교회에서 얻어 잠을 자고… 

그리고 중학교 2-3학년이 되어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피씨통신에서 사귀었던 친구들네 집을 전전했었다. 

일주일을 훨씬 넘게 방학의 절반을 나가서 지내게 된다.

대학로에서 연극이라는 것도 보고, 가수 콘서트에도 따라 다녀보고… 


서울역에 도착해서 시간표와 행선지를 보면서 “어디를 가보지?”라고 14살의 소년은 머리를 들었고,

지나가다 괜찮은 동네에서는 그냥 내려서 구경을 했으며,

기차값을 아끼기 위해서 멀쩡히 자리가 있는 기차도 일부러 입석을 끊어서 다녔으며,

시골기차역장 아저씨들은 그렇게 혼자 여기저기 다니는 애를 위해 표를 공짜로 내어주기도 했고,

밥을 공짜로 주던 많은 식당과 절 

그리고 잠을 공짜로 재워주던 - 일부러 추운 겨울날에 나를 위해 보일러를 틀어 주었던 교회들이 있었다. 

그 나이에도 전주의 전동성당은 너무 멋있었고, 길거리의 분식점도 맛있었고,

대전의 성심당 튀김 소보로는 엄청나게 맛있었으며. 인천공항은 삼산면이라는 배를 타고 가야하는 염전이었다. 


가끔 이런 얘기를 해주면 어떤 부모들은 “그때는 세상이 이렇게 위험하지 않았어”라고 한다. 

그때가 개구리 소년 사건이 일어나고 그놈 목소리 사건들이 한참 일어나고 

유괴 사건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던 때였는데요? 핸드폰도 없었고…라고 대답한다. 

세상이 위험한 것보다, 자식이 얼만큼 컸는지를 보는 눈이 위험한 것 아니냐고… 

애들은 점점 더 어린애들이 되어가고 있다고. 

부모 입장에서 애들이 어릴수록 애들 키우는 재미가 있긴 한데, 그런 게 애들이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중학생 되면 새장에서 떠날 준비를 시켜야 하는 거라고…

솔직히 난 애들의 사생활과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부모는 애들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와 다양한 문화에서 자녀 양육과 부모자식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가장 이상한 형태의 관계이기도 하다. 

애들을 떠나 보내는 걸 두려워 하는 최근의 많은 부모를 보게 된다. 

대학에 갔는데도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할지 상의하고 정해주며 대부분의 일에 부모가 같이 한다. 

내가 그 아이이고,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면, 굉장히 외롭고 부모에게 화가 날 것 같다. 

부모가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세상에는 없고, 생각보다 혼자서 결정하고 자기만의 무언가를 부모와 관련없이 한 게 별로 없다. 

어쩌면 부모는 이 세상에 없을 때, 그 자식에게 마음의 무언가로 남아 있는 가장 좋은 친구여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내 신용카드에서 바로 결제가 되었단다.

도쿄행 79편을 탄다. 예전 컨티넨탈 컨피겨레이션으로 되어 있는 자리. 그리고 컨티넨탈의 루트. 

친구는 토론토행 나는 도쿄행. 

나리타 아나항공 라운지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콜라 한 캔을 먹고 나서는 다시 싱가포르 행. 

서늘하니 걷기 좋았던 날씨는 사라진채, 다시 33도의 무더위다. 


기내에서 본 영화, the awkward moment에서 잭 에프론인가 하는 배우의 대사가 대충 이랬던 것 같다. 

뉴욕은 멋지고 가질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하다고.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냥 모조리 가질 수 없는 것들, 잠깐 들렀다가만 가야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가짜 같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여기에는 도대체 누가 살고 있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도대체 여기서 누가 진짜 살고는 있을까 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라시 택시 - 

나라시가 가짜라는 말을 조금이라도 포함한다면 어쩌면, 뉴욕은, 

나라시 뉴욕이었다. 



특별부록: 그리고 다시 뉴욕


#1. 내가 장난 삼아 유할 덤핑으로 표를 뉴욕-싱가포르-뉴욕-싱가포르로 끊었단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싱가폴에 다시 적응할 때즈음, 아아악! 다시 뉴욕에 가야한다고? 소리쳤다. 


#2. 어쨌든 표를 날릴 순 없고 가긴 갔다. 게시판에 올렸듯이 뉴욕-필리-디씨로 해서 디씨에 있는 친구와 오랜만에 재회. 

      싱가폴에서 지지리궁상을 떨고 있는 날 보며 그 오래된 친구는 

     “우리 친구들 중에 가장 미국놈 같은 놈이 왜 동남아를 간다고 해서 그 개고생을 하고 있냐?”하며 정색을 하고 혼낸다. 

     이 친구에게 “미국놈”의 기준은 추운데 반팔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는 것… 


#3.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알았다. 일요일에 근처에서 Macy Gray가 콘서트를 한다는 걸.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편이 일요일 아침… 바꿀 수도 없고 마음이 슬펐다. 


#4. 기내에서 승무원과 유나이티드와 컨티넨탈 합병으로 우리 모두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NRT-EWR 컨티넨탈의 옛기재와 옛좌석 배치가 있는 비행편을 보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비즈니스도 컨티넨탈은 풀플랫으로 한줄에 여섯개만 넣었는데 유나이티드는 세상에 여덟개를 넣어… 

      근데 뉴욕에선 뭐하니? / 딱히 할 일은 없고 친구만 잠깐 만났다 가려구요… /

      언제 돌아가니? / 일요일이요 / 아니 그렇게 일찍? 근데 일요일에 도쿄에 태풍이 온다고 해서 난리던데…?

      정말요? 그럼 스케쥴 취소될 수 있는 거에요? / 응 승객들 스케쥴 조정중이더라 / 

      으악! 저 그러면 메이시 그레이 콘서트도 갈 수 있겠네요!! 와!!! / 헐! 님?!


#5. DCA-JFK 구간을 BA 마일로 끊어서 AA 스탠바이를 걸어 타고 제 시간에 도착. 

      지난달에 갑자기 AA에서 올해까지 플래티넘 회원 자격을 준다고 메일이 왔었다. 

     왜 줬는지는 이해가 안간다. 여튼 그 덕분에 스탠바이 수수료도 안냈다. 


#6. Englewood라는 뉴욕 포트오소리티에서 한참 가는 마을에서 마을 회관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한단다. 

      어딘지도 모르고 포트오소리티에서 표를 왕복으로 구해서 탔다. 

      구글맵에서는 63개의 정류장을 가야한단다. 왕복이면 126개의 정류장을 가는 거구나… 

      버스는 50분 정도 걸린다는데 버스만 한시간 반을 탔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많아서… 

      뉴욕이 훤히 멋있게 보이고 요트장 같은 것도 보이는 마을을 지나니… 

     한인 마을 같은 곳이 보인다. 여기가 플러싱이라는 곳인가? 잘 모르겠다. 

     사실 LA건 어디든 한인 타운을 가본 적이 없다. LA한인타운 어딘가에 잠깐 픽업하러 간 적은 있는데, 

     미국에서 이렇게 큰 한인 타운을 처음봐서 입이 떡벌어졌다. 


#7. 그 마을을 지나니 라티노 라티나 그룹이 주로 사는 마을인 것처럼 추정되는 곳이 나온다. 

      그만큼 흑인들 인구도 많다. 

      언젠가 지리학에서 미국의 인종별 거주지를 보여주면서 

      아시아인들 특히 한국인들의 마을은 이렇게 백인 중심의 마을과 흑인/라티노그룹 중심의 마을 사이에

      일종의 버퍼처럼 존재하고 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이게 바로 그런 소리인가 싶었다. 


#8. 그 유색인종 마을에 비영리 작은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으슥한 길을 지난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이런 길이 너무 무서웠는데, 요즘엔 그냥 다른 사람들 입장에선 나도 얼마나 무섭게 보일까 싶다. 

     으슥한 초행길을 겨우 찾아왔는데, 마을에 있는 작은 극장. 메이시 그레이가 더 멋있어 보였다. 

    뉴욕의 맨하탄도 아니고, 이런 유색인 마을에 극장에서 소박하게 공연을 하다니… 

     감격해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변을 한참 서성댔다. 한장면 한장면 다 머리에 기억하고 싶어서. 


#9. 옛날 춘천의 육림극장 같은 의자 구성. 더 멋있엇다. 

      콘서트를 하기엔 음향 시설이 부족하고 하울링도 있는 것 같은데 

      이미 기분상으로는 최고의 공연장이었다. 

     어마어마한 그루브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으면서 행복했다. 


#10. 가장 인기를 끌었던 I try를 마지막 앵콜곡으로 부르는데… 

        정말 너무 잘 불러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중에 칠십이 되어서도 손자가 생긴다면, 아니면 혹은 아주 어린친구가 생긴다면 

        “그날 메이시 그레이는 최고였어!”라고 하면서 얘기할 정도였다. 

       옆자리에 있는 할머니가 말을 건낸다. 

       “내가 혹시 너에게 뽀뽀를 해도 되겠어? 너는 너무 예쁘고 이 노래는 너무 황홀해.” 

      내 평생 언제 생면부지 사람에게 이 쌍판대기로 이쁘다라는 소리를 들어보겠는가. 

      “Be my guest please.” 

       그 공연장에서 생면부지의 할머니와 뜨거운 포옹과 키스를 했다. 



지금 이 여행기를 쓰고 올리는 건 조금 전 내린 나리타 공항. 

지난 며칠이 꿈만 같았다 - 파울로 누티니를 보기 위해서 무턱대고 와서

헤드윅을 보았고, 원스도 보았으며, 고흐와 호퍼도 보았고 

마지막엔 메이시 그레이도 함께 했다. 


함께 여행해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또 그때의 행복을 담아 다른 분들도 느껴 보시라고,


Macy Gray의 I try 링크를 올려본다. 


어쩌다 뉴욕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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