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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오늘 그런 밤

사리 | 2015.02.14 08:21:23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맥주 이빠이 마시고 주절주절 글을 썼는데,

마일모아 게시판에 올리라고,

타국에서 사는 어떤 느낌을 공감할 사람이 많을 거라고...

누군가 강요해서 올립니다.

근데 하도 신변잡기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올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은 우선 듣고 봐야 하는지라 올리는데...

내일 아침 일어나면 후딱 지워버릴지도... 


1. 가끔 어린 시절 몇 가지 장면들이 불현 떠오르곤 한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서태지가 삼천리자전거 레스포 광고를 하던시절, 16단인지 몇 단인지는 기억이 안나는 자전거를 16만원인가 주고 아부지가 사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겁이 많아 두발 달린 자전거를 6학년 때야 되어서 누나한테 배우게 됐는데, 막내누나는 정말로 나를 많이 때리고 욕을 해서 펑펑 울면서 자전거를 배웠었다. 그렇게 배운 자전거인데 어엿한 자가용이 생겼으니 그게 그렇게 좋았다. 일년도 채 타지 않은 그 자전거를 자물쇠도 채웠는데 도둑을 맞아서 정말 서러웠었다. 한동안 풀이 죽어 학교에 갔었다. 

2.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국민학교 1학년 때, 누나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새벽에 쓰레빠만 신고 우리집으로 피신해 오곤 했다. 산 밑에서 벌을 치던 남편은 평상시에는 그렇게 점잖고 수줍은 사람이 따로 없었는데, 술만 먹었다하면 그렇게 부인을 쥐잡아 때리는 인간이었다. 그후 술이 깨서는 "나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라는 제목처럼, 부인에게 그렇게 싹싹 빌며 천사같은 남편이 없었다. 남자가 괴물이 되면 그 여자는 자기반 학생의 학부모 집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집으로 왔다. 아마 시골 엄동설한에 갈 곳이 없었기도 하고, 동네 지식인이었던 시골 선생의 체면으로 따로 갈 수 있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3. 새벽에 문을 뚜드리는 소리가 나서 깨면 엄마는 그 선생님에게 물을 먹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녀를 달래주었다. 수 없이 반복되는 일에서 나 또한 잠시 깼다 다시 잠에 들곤 했지만, 엄마는 등을 토닥이면서 선생으로 혼자 벌어서 애 둘 못키우겠냐며 빨리 이혼을 하라고 말하곤 했다. 80년대였던지라, 애비없는 자식으로 손고락질 받고 애들 삐뚜루 클까 이혼은 못하겠다고 하면, 지 어미가 어떻게 산지 똑똑히 봤는게 그걸 본 자식 새끼가 그깟 손고락질로 삐뚜루 클 자식이라면 자식새끼도 아닌 배워먹지 못한 것들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숨 자고 그 선생님은 어제 저녁 맞은 얼굴의 멍을 두꺼운 화운데이션으로 바르고 누나와 함께 등교를 했다. 누가 말하진 않았는데, 1학년짜리였어도 절대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이 그렇게 맞고 사는지는 아마 아무도 모른 듯 했다.

4. 학교가 끝난 뒤 집에 가는 게 무서운 선생님을 위해 아빠는 그 집에 함께 가곤 했었다. 할 일 없는 국민학교 1학년짜리인 나도 함께 따라 갔다. 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집에 아빠가 앞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죄인의 표정으로 그 아저씨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무릎을 꿇고 "형님 잘못했습니다"라며 싹싹 빌곤 했다. 아빠는 늘 같은 말을 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못나빠진 새끼가 처자식 쥐어패는 새끼다라며 꾸짓곤 했다.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내 아부지한테 잘못했다고 빌 이유는 없었다. 그는 옆에서 겁에 질린 채 현관에 들어선 선생님에게 사과를 먼저 했어야 했다. 여튼 몇년후 그 선생님은 이혼을 했다. 안했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도시로 전근을 갔다. 

5. 시장 어귀에는 뿌리라는 맥주와 양주를 파는 시골 술집이 있었다. 농한기에는 추수를 끝낸 농부들이 마담에게 치근덕거리며 술을 마시는 곳이었고, 평소에는 외박을 나온 군인들이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뿌리 아줌마는 어린 내가 봐도 정말 미인이었는데,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서울에서 여공을 하다가 어찌어찌 술집에 나가게 됐고 독하게 돈을 모아 시골 구석에 작은 술집을 차린 아줌마였던 걸로 기억한다. 시장에서 장을 보다 어찌어찌 안면을 트게된 엄마는 자기보다 어리던 뿌리 아줌마랑 친구가 되었다. 아빠는 좁은 동네에서 술집 아줌마랑 친구 먹으면 어쩌냐며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엄마는 걔가 얼마나 불쌍하고 착한 애인데 색안경을 끼고 보냐며 화를 내곤 했었고 같이 식사도 하고 집에도 찾아오면서 아빠도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었다. 

6. 잠이 오지 않는 어떤 밤에는 어슬렁 어슬렁 동네를 놀다가 그 술집에 가곤 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아래에 있는 술집 간판 같이 조악한 간판으로 휴먼궁서체로 뿌리라고 써 있는 집이었다. 그 집에 들어가서 놀다보면 뿌리아줌마가 커피 땅콩도 주고 콜라도 주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오렌지가루로 주스도 타서 주었다. 치근대는 아저씨가 있을 때에는 옆자리에 날 앉혀 놓곤 했는데, 내가 앉고 얼마되지 않아 그 아저씨는 계산하고 나갔었다. 가게방에 딸린 방에서 커피땅콩을 집어 먹으며 텔레비젼을 봤던 기억들도 있는데, 아마 최수지가 나오는 토지였을 것이다. 뿌리 아줌마는 주변 동네 농부 아저씨와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가 하도 때리는 바람에 이혼을 했고 도시로 나갔다. 다행히 괜찮은 아저씨를 만나 재혼을 했고 지금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단다. 몇년전 엄마에게 뿌리 아줌마 소식을 물었더니 일부러 연락은 안하고 몇년에 한 번 가끔 오는 연락은 받는다고 했다. 그냥 이 동네에서 살았던 삶은 걔한테 과거로 묻어두는 게 좋지 않겠냐며... 

7. 얼마 없는 중학교 친구이지만 지금까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는 시장 어귀에서 미용실을 하던 이모가 있었다. 이모는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호방하고 30초마다 웃긴 말을 던져주는 사람이었다. 가끔 친구와 미용실에 가면 아직 자르지 않아도 되는 머리였지만 사람 없을 때 빨리 자르자며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고 이것저것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었다. 가끔씩 그 시골의 미용실에서 까까머리 중학생들은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우먼센스와 같은 잡지들을 들춰보면서 똑같은 머리로 자르곤 했었다. 정말로 그냥 친구 같은 "이모"였다. 너희들은 하이트가 좋으냐 카스가 좋으냐를 묻곤 했는데, 하이트가 좋다는 내 대답에 중학교 졸업식에는 끌고 가서 하이트 맥주를 실컷 사주기도 했다. 

8. 그 당시 여자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업도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돈을 버는 여자들의 남편은 하나 같이 개차반인 경우가 많았다. 이모도 결혼을 하여 두 딸을 두긴 하였지만, 철 없이 사고를 치고 뚜렷한 일도 안하고 폭력도 휘두르는 남편과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남자들이 늘 그렇듯, 돈이 필요할 때면 이모의 미용실에 찾아와 또 횡패를 부리곤 했다. 참다 못한 이모는 결국 가게를 접고 언니가 먼저 가서 한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던 도쿄로 가게 됐다. 나 또한 도시로 고등학교를 가고 나서였을 것이다. 이모에겐 어린 두 딸이 있었는데, 두 딸은 결국 친구의 부모님이 맡아 키워주기로 했다. 군인이었던 친구의 아버지는 평생 간절히 딸을 갖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내 친구를 포함해 아들만 둘만 낳자 병원에도 가지 않던 이였다. 다행히 친구 아부지는 조카들을 딸로 받아들였고, 정말로 딸로 키웠다. 다행히 그 아이들도 이모부를 아부지로 이모를 엄마로 부르며 마음이 건강하게 잘 커주었다. 친부모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모와 이모부를 엄마 아빠로 부르는 그 속은 어땠을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정말 착하게 잘 커주었다. 내 사촌동생들보다도 나에게는 훨씬 더 가깝고 애착이 가고 애틋한 아이들이기도 하다. 

9. 일본으로 가서 고생도 많이 하였지만 기반도 조금씩 마련했고, 괜찮은 아저씨와 다시 재혼도 하였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가끔 통화하곤 하였지만, 내가 미국으로 건너 가면서 그 호방한 목소리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친구를 만날 때면 안부도 묻고 이모의 이야기도 건내 듣곤 했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은, 정말 그 굴곡에 버텨내기에는 참으로 힘든 타지의 삶이었을 것이다. 실패한 결혼과 망나니 전남편, 그리고 핏덩이들을 두고 떠나온 타지의 삶. 그 자체로도 그녀가 얼마나 쉽지 않았을지 하루가 얼마나 험난 했을지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10. 어제 사온 말레이시아산 옥수수를 저녁으로 쪄먹을 생각에 한껏 들뜬 토요일 저녁이었다.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이모가 조금전 돌아가셨단다. 직업병인지 덕후병인지 모르겠지만, 눈이 깜깜해지는 것보다는 친구 부모님과 아이들 도쿄로 빨리 보내는 것부터 걱정이 들었다. 사실 항공 덕후로 산다는 것은 어쩌다보니 해외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친구들 집안의 조사를 가장 먼저 알게된다는 것이고, 그때마다 가능한한 빨리 그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게 내 일이었다. 주말에 설 연휴까지 겹쳐서인지 요즘 그렇게 자리가 한가하다던 도쿄행 항공권이 바닥이 났다. 겨우겨우 자리를 억지로 만들어서 친구가 편도표를 끊고 있는 사이, 나는 입국 거부 당할까봐 돌아오는 표를 임시로 만들어 두는 작업을 했다. 친구 부모님과 동생들 여권 이름을 확인하고 기입을 하는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오른손 검지손가락 하나로 한글자씩 입력해서 표를 만들었고 발권이 되어 들어오자 그제서야 실감이 났는지 눈물이 났다. 

11. 내 어린 시절 추억의 곳곳에 있는 어른들이 그렇게 사라져간다. 도쿄에 가게 되거든 이모에게 연락해서 기린 생맥주 한잔 꼭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이루지도 못한 채 그렇게 그 이모는 떠났다. 발권이 끝나고 잠시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집앞의 편의점으로 가서 맥주 몇 캔을 담아 왔다. 굴곡 많았고 한 많았을 그 삶을, 평생 나를 이름 대신 "하이트"라고 불렀던, 그리고 한 번 내가 답례로 사주지 못했던 그 맥주 한잔을 위해 이 새벽 혼자 건배를 했다. 캄보디아산 앙코르 맥주가 오늘은 하이트 맛이 나는 듯 하다. 이모!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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