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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여행기]
(후쿠오카에서) 지소. 미아.

사리 | 2020.01.03 11:53:38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지난 번 약속했던 여행기를 이제서야 올립니다)

 

지소미아가 종료될 거라는 그날,

나는 후쿠오카 공항에 있었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행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후쿠오카는 21년만이었다. 

98년 그 당시 후쿠오카에 왔을 때에는 깨끗한 풍경에 놀랐고

후쿠오카 돔에 놀랐으며, 음반 가게에 놀랐고,

전자 제품 가게에서는 미래를 보는 기분이었다. 

일본은 미래였다. 일본에 갈 때면 시간이 한참 앞선 동네에 온 기분이 들었고,

내가 살고 있던 한국은 아직 가야할 시간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기만 했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일본에 갈 때에는 과거로 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팩시밀리가 전자제품 가게에는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고,

저런 디자인의 스마트폰을 누가 쓰지? 싶은 것들이 주루룩 자리 잡고 있었고,

카드가 안돼 동행한 사람들이 모두 현금을 탈탈 털기도 했었다. 

 

공항에 일찍 도착하여 남자 화장실에 갔다.

세면대 근처에 큰 이민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화장실이 좁아, 똥싸는데 방해가 되었나 싶었다.

 

두어시간 공항에서 책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조금 늦나보다. 

다시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아까 본 그 자리에 그 가방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유명한 unattended baggage.

공항 테러에서 1급 위험 요소. 

 

옆집 사람보다 더 관심 없어진 헤어진 옛 연인 보듯,

모든 연결 작용을 잠쉬 쉬고 있었던 머리속의 뉴런들이 촛불시위에 다 쏟아져 나온 것처럼

머리는 빠르게 돌기 시작했고 동시에 하얘졌다. 

가방을 두고간 누군가 똥싸러 들어가 두시간 넘게 있다는 것은

변비로 고생하던 사람이 힘을 빡 주다가 뇌에 혈관이 터져서 그 자리에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테러 위험이 매우 높은 것이었다. 

저것이 탄저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몇 년 전 미국에서 있던 일이 플래쉬백 됐다.

 

그때는 수업 조교로 들어가기 위한 대학원 어학 수업을 듣고 있던 학기였다. 

담당 교수는 똘끼 충만한 표현들이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미국 드라마에서 꼭 한명은 있는 그런 캐릭터였다.

이상하게도 내 귀는 CNN 저녁 뉴스 앵커 같이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아도

1분당 단어를 300개는 뱉어낼 것 같은 똘끼 충만한 분들의 말은 모조리 다 들렸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내가 그 수업에서 배운 것은 단 세 가지였다. 

1. 중국 남부지역부터 동남아 지역에 특히 남자들의 영어는 미국인들의 귀에는 정말로 안들리는 영어라는 것.

2. W발음은 내가 조음 기관을 돌려 깎아도, 아니 죽었다 도로 깨어나도 절대로 발음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would랑 wood가 다른 발음이었다니... 젠장할)

3. sneak into 라는 표현이 "몰래 쳐 기어들어 가지 좀 말아라"라는 말을 아주 간결히 나타내는 것.

 

 

수업을 몇 분 앞두고 urgent 라는 메일이 도착했다.

그 메일에는 수업을 하는 그 건물에서 unattended baggage가 발견되었고

폭탄 처리반이 와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건물을 봉쇄한 후 작업을 하고 있으니,

수업이라고 건물로 몰래 기어 들어 가지 좀 말라는 것이었다.(don't sneak into the building!!!)

 

건물 밖에서 보는 그 장면은 포스트 911 시대의 미국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하루에 단백질을 1킬로 정도는 너끈히 먹을 것 같은 미쉐린 타이어 캐릭터 같은 아저씨들이

닌자 거북이 같은 복장을 하고서는 

로봇이 등장해서 가방을 가져와 무슨 상자에다가 넣었다.

cool! Awesome!을 그 자리에서 외쳤다. 

 

쪼만한 백팩 하나를 닌자거북이 복장을 한 미쉐린 타이어 아저씨들이 수십명이 몰려와

건물을 봉쇄하고 로봇으로 꺼내는 장면은 꽤 복잡한 마음이었다.

자기들이 직접 가서 할 것도 아니고, 밖에서 로봇을 리모콘으로 조절하는데

근육이 투터워서 리모콘 조절하는데 에러나는 것보다는 좀 마른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책가방 하나에도 질색을 하면서 그 많은 인원이 와서 테러 대응을 하는 그 장면이

포스트 911 시대의 미국의 단면인가 싶은 마음에 씁쓸했고,

무엇보다도, 여태까지 미국의 대학에서 백팩이 사람 죽였다는 소리를 한번도 못들어 봤는데,

가방 하나에 벌벌 떨며 저 많은 인원이 동원돼서 세금을 쓰는 것보다,

차라리 총 관리 하는 게 싸고 덜 죽지 않을까 싶었다. 

 

여튼 오만 난리통이 가방 하나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몸소 경험했던지라,

나는 이곳이 고속도로를 지나가다 옆으로 보이는 식물들이,

키가 좀 크면 옥수수요, 키가 좀 작으면 콩뿐인 그곳에서 

이스트백 가방 하나에 오만 난리를 쳤던 것이 상기됨과 동시에,

이곳이 단순히 옥수수밭과 콩밭이 아니라, 국제 공항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고려해볼 때

저 가방은 분명, 

십중 팔구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천분의 일 정도는 매우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쨌든 이해가 안가는 것이었다.

화장실 입구에 점검표에는 계속 관리자가 들락 거리고 곱게 서명도 했는데,

그 시간에도 분명히 저 가방은 있었는데 왜 이것이 감지되고 처리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뉴런은 열심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똥싸다가 혈관이 터진 것은 아닐 거야.

가방을 두고 간 테러리스트는 화장실 관리인을 이미 매수했을지도 몰라. 

왜 도쿄가 아닌 후쿠오카일까??

어쩌면 중심을 테러하는 것보다 변죽을 올리는 방식으로 했을 수도 있어. 

화염병도 신촌에서 던지는 것보다 제주도에서 던졌을 때 덜 잡힌대잖아.

포천 여중생 살인 사건도 살인 사건에 서툴었던 지방 경찰들이 초반 수사를 잘못하는 바람에

영구 미제 사건이 되었다고들 하잖아.

쓸데 없이 너무 활발해지는 뉴런들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만 했었지만 

그들의 자유의지를 내가 통제하기엔 글렀다. 

 

입국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나이트 기도처럼 서 있는 공항 경비대에 먼저 갔다. 

"남자 화장실에 가방이 있어요! 두시간 넘게! 언어텐디드 배기지에요!" 

북한군이 쳐들어 오는 걸 보았던 38선 근처의 마을 주민이 경찰서에 가서 무엇인가 떼로 내려온다고 사자후를 뱉듯 나는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의 위중함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과장된 표정과 두 피치는 높은 소리로 말했다.

 

여름철 밤잠을 설치게 했던 모기를 때려죽였는데,

벽지에 내 피인지 모기의 피였는지 모를 빨간 피가 흥건하게 묻었을 때에도

그 보다는 더 많은 얼굴의 표정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이 경비대 아저씨는 정말로 얼굴에 보톡스 300방을 때려 맞아서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인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단 두마디를 외쳤다.

"노 잉글리쉬"

 

스무살 넘어서 적어도 공개 장소에서 어떤 것에 대한 반응으로 즉각적으로 나온 적이 없었는데

보톡스 삼백방의 무표정으로 노 잉글리쉬를 외치며 뒷쪽으로 손짓을 하는 그 아저씨를 보며 나는 외쳤다.

"아 씨발..."

 

뒷편에 있는 관광 안내 데스크로 갔다.

나는 급한 표정으로 달려갔다. 

"can you speak english?"

"of course"

"ok. there's a bag for more than 2 hours in the men's room.."

 

웃는 얼굴로, 하지만 영혼은 어디다 위탁 경영하고 있을  때

우연치 않게도 보톡스 300방을 맞아서 그 표정 그대로 얼굴이 굳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한 그 안내원은

"오!! 맨즈룸. 고 스트레이또..."

 

단어 하나만 픽업해서 상황을 이해한 것 같다.

아니, 슬프게도 영혼은 건조기에 돌려 놓은 채 웃는 표정 하다가 보톡스 300대를 맞아서

그 표정 그대로 잠도 잘 것 같은 그 분은,

내가 경황 없는 표정으로 달려와 뭐라 하더니 "맨즈룸"이라는 말을 쓴 것으로 나름의 추리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림으로 그려져있는 화장실 표식도 찾지 못할 정도로

엉덩이 사이를 택사스 물소떼처럼 무엇인가가 빵 터질 것 같은 상태여서 눈앞이 깜깜해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안내원을 달려와 내 항문을 편히 풀어 둘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으로 그 사람은 이해한 것 같았다.

"unattended baggage! 2 hours! men's room!!!" 

문장을 주면 안될 것 같아, 단어를 던졌다.

단어를 던져도 unattended 라는 말이 너무 어려울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역시 그 보톡스 표정으로 "아노........."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오....."

그냥 물었다. "웨어 이즈 폴리스!!!"

그 분은 맥락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똥 마려운 애가 왜 경찰은 찾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은 변하지 않고 같은 톤으로 말해준다.

"싸드 플로아"

 

삼층으로 달려갔다. 

큐슈지역, 아니 후쿠오카의 생화학적 테러는 내 손에 달린 기분이었다.

이 공항은 모두들 평안하고 떠나는 설램과 돌아오는 이들의 평온함만 가득한데

이 공항에서 나혼자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24의 잭바우어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3층에 갔지만 경찰은 커녕 포돌이도 찾을 수 없었다. 

몇 몇의 직원에게 달려갔지만, 그들은 아마 영화 <부산행>을 본 것이 분명했다.

좀비들이 달려올 때처럼 내가 다가가면 모두 다 피해버렸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방법은 하나였다. 

여기서 본 유일한 공권력에 가까운 사람.

무표정 보톡스 300대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언어는 안통하니,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고 

나이트 기도도 자리 뜨면 쿠사리 먹는데,

입국장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그 사람을 화장실로 끌고 갈 수도 없고,

그 사람이 제아무리 무표정이라지만,

처음 본 남자가 손을 강제로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가는 것은

그 사람한테도 뭔가 굉장히 이상하기만 한 상황 같았다.

 

방법은 하나. 보여주는 것. 직접은 안되니 간접적으로.

화장실 앞으로 갔다. 들어 가기 전 깊은 숨을 들이 마쉬었다.

들어가서 가방을 사진으로 찍었다.

화장실에서 사진찍는 것은 정말로 인간으로 상종하지 못할 종자들만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그 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찍었다가 터지면 내가 일빠로 죽을 것 같았고,

적어도 이곳이 남자 화장실이라는 사실이라는 걸 보여줄 것도 필요해서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소변기도 프레임안에 담으며 가방을 찍었다.

 

그에게 갔다.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톡스를 300대가 아닌 295대만 맞았던 것 같다.

보톡스 담당의가 잠깐 카톡하는 사이 숫자를 잘못 세서 빼먹은 5군데에서 표정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소리쳤다.

"언어텐디드 백!! 투 아워즈. 투아워즈!!!"

적어도 이 사람이 일본의 공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투 아워즈라는 말은 알아 들을 거란 확신으로,

"조또..."라고 하더니 그가 어디론가 무전을 쳤다.

오늘 참 욕이 많이 나오네...

 

로봇이 올까, 테러 부대가 올까.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할까 아니면 멀리 대피해야할까.

그래도 발견자로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이 사태를 모르는 타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저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나. 

영어로 해야하나 한국어로 해야하나. 일본어로 "탈출!!"이라고 외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15년전 도쿄에서 흘러 나오던 빠찡코 광고가 떠올랐다.

"꽁꼬르도에 이끼마쇼!!!" 물어봤을 때 꽁꼬르도라는 빠찡코에 갑시다! 라는 말이라고 했었다.

추론해보면 이끼마쇼가 갑시다가 된다.

근데 탈출 상황에서 "갑시다"라니 너무 점잖은 거 아닌다.

"이끼마쇼! 이끼마쇼!" 

무슨 후쿠오카 공항의 보톡스 전문 병원 삐끼 같이 들리는 소리였다.

그냥 입은 다물되 지켜보자. 이게 내 결론이었다. 

 

로봇도, 부대도, 적어도 2-3명의 팀도 아니었다. 

그 화장실을 향해, 한껏 산달 다된 배를 벨트로 휘감고 경비대 유니폼을 입은 중년 아저씨가 뽈뽈뽈 걸어간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가 지나갈 때처럼, 정말로 내 귀에는 "뽈뽈뽈뽈"이라는 효과음이 들렸다. 

 

생면부지의 토토로 아저씨의 안위가 그토록 걱정된 적은 없었다. 

보호 장구도 없이, 그것도 혼자서.. 저렇게 가는 것은 괜찮을까.

후쿠시마 때 이주노동자들 산업 연수생 받아서 보호 장구도 없이 잡아 넣었다고들 하던데...

저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건 둘째치고 정말로 폭발물이거나 생화학무기라면 저렇게 가서 처리하면 

여기있는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리를 떠야 하는가...이끼마쇼를 외쳐야 하는 것일까.

 

그는 바로 얼마뒤 다시 토토로처럼 그 화장실에서 나왔다.

한껏 배를 뽐내며, 오른손엔 그 바퀴가방을 굴리면서.

효과음이 역시 들렸다. 뽈뽈뽈뽈.

그 뽈뽈뽈 소리에 맞추어, 바퀴의 달그락 소리가 깔린다.

그는 너무나 고요하게 공항 맞은 편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출입문 기도 아저씨도,

안내 데스크의  아주머니도,

모두들 그 보톡스 표정대로 계속 있었고,

활발히 운동하던 내 뉴런들은 갑자기 농약이라도 한잔 들이켰는지,

그냥 소리만 스쳐갈 뿐 모든 것이 정지된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렸던 걸까.

늦은 밤 나는 항구 근처의 온천으로 갔다.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티비에선 지소미아가 연장됐다면서, 한국의 항복을 이끌어냈다는 듯 말하는 것 같다.

패널도, 앵커도, 기자도 싱글벙글 표정으로 자존심 레벨 1이 올라간 듯하다.

앵커는 한국 일본 미국의 입장이라면서, 화면을 삼등분 해서 서울과 워싱턴 도쿄에 있는 기자를 보여준다.

그 기자들 밑에는 자막이 써 있다.

미국에 있는 기자 밑에는 good news

일본 기자 밑에는 한자어로 "당연" (혹은 이런 비슷한 말이었다)

한국 기자 밑에는 뭐라고 써 있는데 읽을 순 없었다. 추측해보자면 망신.. 뭐 이런 말이 아닐까 싶다. 아닐 거다. 

 

모두들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보톡스를 맞지 않은 것 같았다.

같이 탕에 있던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서 "캉코쿠" "지소미아" 뭐라고 말을 한다.

기분이 다들 좋은 듯 했다. 

 

 

나는 지소미아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게 외교적으로 뭔지는 모른다.

그냥 알고 있는 것은 한국을 침범했던 나라와 기밀 군사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

일본이 한국에 주는 군사 정보라야 한국은 이미 다 파악이 된 것이고,

북한이 미사일 쏘면, 둥근 지구 덕에 한국이 가장 우선 파악해서

그 정보를 공유해주면 일본과 미국이 이득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그걸 연장하느냐 마느냐는 내가 어떻게 판단하기 보단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만약 투표를 해야한다면 내 수준에서 듣고 좀더 설득력 있는 걸 고르겠지 정도가 내 입장일 뿐이다.

 

보톡스 없는 의기 양양한 목소리와 알몸으로 마주한 다른 일본 아저씨들을 보면서

적어도 나에겐 한 가지 의문은 생겼다.

 

때로는 미래에 온 것 같았던,

그렇게 치밀하고 관리가 철저하다던 일본에서 내가 그날 겪은

오로지 나만 겪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 그 나라의 대문인 공항에서 내가 본 것은 이랬다,

두 시간 넘게 방치된 짐가방.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시간 마다 관리가 되었다고 체크되었지만 내동댕이 쳐져 있었던 가방.

노 잉글리쉬를 외친 공항 경비대.

화장실만 알려주던 안내원,

출국전 쇼핑을 하세요, 4층엔 식당이 있어요라고 알려주지만 긴급 상황이 생기면 누구에게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절대 알려주는 공항 표지판들.

어디있는지조차 보이지 않는 공항 경찰,

파트너 한 사람도 어떤 장비도 없이 토토로처럼 걸어가고,

아무런 위험 테스트도 없이 사람 많은 곳으로 그냥 끌고 나오던 공항 경비대.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 공항 한복판에서 봐서는 안되는 장면이었다. 

무엇이 치밀한 것인지, 무엇이 관리가 잘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할 순 없었다. 

 

 

뼈속까지 친일에 가깝던, 한 언론사의 도쿄 지국에 근무하던 기자 선배랑 몇 년전 도쿄에서 맥주 한잔을 했다.

단순히 역사적으로 친일이 아니라 그는 참 일본을 좋아했다.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묵묵히 가는 그 나라를 사랑했다. 

나는 그를 시대 잘못 태어나서 고생한다고, 일제 시대 태어났으면 한 자리 제대로 차지하며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릴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며 그를 위로해주곤 했었다. 

 

후쿠시마 사태 때, 그는 도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난리를 어떻게 정부가 대응하는지를 보았다.

그가 알고 사랑했던 일본은 깨진 것 같았다.

위기는, 매뉴얼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매뉴얼 밖에 있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들은 정말로 무기력했고 무얼 해야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한국은 때론, 그런 상황에서 목소리 크게 내면서 순발력이든 뭐든 다 동원하곤 하는데,

그냥 묵묵히 무기력하게 매뉴얼이 어딘가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믿었던 일본이 아니었고, 정말로 형편없는 국가라는 걸 위기 대응을 보니 알게 됐다고 하소연을 했다.

 

적어도 그는 매뉴얼상에 없었던 상태에서를 본거라면,

나는 전세계 공항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 세계에서 방구 좀 끼며 살고 있다는 나라라는 곳에서는 

기본중의 기본인, 매뉴얼에 그대로 나와있는 것조차 대응하지 못하는 그 나라를 보았다.

 

여전히 나는 지소미아는 모른다.

군수 물자 관리가 안된다며 수출 우대국에서 한국을 빼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아베는 기억한다.

 

여전히 나는 지소미아는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관리도 안되고,

서로 묵묵히 자기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만을 최선을 다해 소극적으로 하고

조금의 위기에서는 처참하리만큼의 무능력을 보여준 이 나라에게

무얼 믿고 군사 정보를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알 것 같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은 지소미아를 조건부로 연장했고,

일본 뉴스에서 본 미국의 입장은 굿 뉴스였고

일본 뉴스에서 전하는 일본의 입장은 당연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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