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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220501] 미술감상(3/7), 관계 맺기

오하이오 | 2022.04.29 17:55:15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이미 책을 읽거나, 좀 알고 미술을 보려고 했던 분들에게 그럴 필요 없이 작품을 먼저 보라고 한다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조언을 구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분에게 미술 작품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환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먼저 `담론(신영복 저)`의 16장 관계와 인식에 있는 말을 소개합니다.

 

(전략) 사실 ‘관계’는 ‘세계’의 본질입니다. ‘세계는 관계입니다.’ 세계는 불변의 객관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양자 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는 세계상입니다. 세계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뉴턴 시대의 세계관입니다. 입자와 같은 불변의 궁극적 물질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고 파동이면서 꿈틀대는 에너지의 끈(string)이기도 합니다. 끈이 아니라 막(membrane)이기도 합니다. 불변의 존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존재는 확률이고 가능성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관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펼치는 ‘접속’도 이러한 세계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기계라는 중립적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합니다. 대상은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주체와 대상 역시 관계를 통해 통일됩니다. 관계는 존재의 기본 형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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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기 전에는 미술 감상은 작품을 통해 나를 본다거나, 내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 한다는 둥 장황하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이제 명료해졌습니다. 미술 감상은 `작품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관계`가 일상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불러 주고 내가 그에게 달려가서 꽃이 됩니다. 꽃이 되고 안 되고는 관계와 접속에 의해서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입술'은 악기가 되기도 하고, 음식물을 섭취하는 기관이 되기도 하고, 애정 표현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접속과 배치가 바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개념 '관계'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내가 감상하기 전, 그러니까 나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김춘수 `꽃` 참고). 관계를 맺는다면 악기일지, 인체 기관일지, 애정 수단일지는 맺는 이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남이 맺어 놓은 관계인 책에 집착하지 말고( https://www.milemoa.com/bbs/board/9252450 ), 안다는 설정과 그 만큼의 한계도 없이( https://www.milemoa.com/bbs/board/9256125 ) 작품 앞에서 관계 맺기를 시도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업데이트 220501    

관계가 감정(혹은 감동)에 미치는 경험을 부연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7학년인 제 큰아이가 운 좋게 학교 야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이전에 야구 시합을 해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아이가 부원이 될 수 있는 팀이니 실력이 좋지 않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아이는 마지막 이닝에 교체 선수로 타석에 한 번 서거나 수비수로 서 있다가 오는 게 고작이긴 했지만 아이 팀 경기를 빼놓지 않고 봤습니다.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즐겨 봐 왔지만, 그보다 훨씬 재밌고 긴장이 됐습니다. 이 경험을 미술에 대입한다면, 세상이 명작이라 칭송하는 그림 보다 감상자와 관계가 더 깊은 그림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음은 이미 댓글(  https://www.milemoa.com/bbs/board/9256125#comment_9259007 )로 거론했던 제 경험인데, 본문에 남기는 게 좋겠다 싶어 옮겼습니다.

 

제가 아는 한 수녀님과 미술 작품을 함께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현대 추상미술을 좋아하고 할 말도 많은 터라 함께 봤지만 별말씀이 없으셨어요. 많은 분이 그렇듯 미술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고 수줍어하셨는데요. 중세 성화 앞에서는 울컥하시기도 하고, 감탄하시며 복받쳐 하는 걸 옆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 그림들은 제가 제일 지루하게 느끼는 것들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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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추상미술은 아는 게 없다시던 이 수녀님께서 동네 성당을 구경하며 본 추상 모자이크 유지창에 한없이 감탄하고 성당 뒤로 걸린 거대한 추상 걸개를 마냥 아름답다고 칭찬하시더라고요. 감상이 어렵다 하는 건 미술을 알고 모르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였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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