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글

MileMoa

검색
×

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나이 든다는 것이란…

참울타리 | 2023.02.13 12:37:50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안녕하세요.

 

 어제 일요일은 정말 일하러 병원에 출근하기 싫어 몸을 배배꼬면서 결국은 끌려가듯 나갔습니다. 그동안 연속해서 일을 계속해서 생긴 피로감 때문이었을까요. 요 몇 일간은 사람들의 정말 변하지 않는 반응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참 힘들었습니다.

 

 87세 할아버지가 대장에 여러군데 생긴 정동맥 기형 때문에 장출혈이 있으셔서 대장내시경 레이저로 지졌는데도 적혈구 수치가 조금씩 떨어져 가는 상황이라... 정말 어렵지만 제가 할아버지께 이야기 해야 할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냅니다. 

 

나 : "할아버지, 지금 일어날 것 같은 일이 아니지만 병원에선 꼭 물어봐야 할 문제라서 여쭤봐요. 혹, 심정지가 오거나 숨이 멎었을때... (중간 생략, 심폐소생술에 관한 설명이었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할아버지 : "나 죽고 싶지 않아!"

 

나 : "할아버지, 지금 당장 돌아가실 거 같아서 여쭤보는게 아니라혹 그런 상황에 닥칠 수 있으니 미리 병원에서 할아버지 의사를 물어보는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 오래 사시길 바라죠."

 

할아버지 : "지금 안락사 이야기 하는 거야? 죽기 싫다니까..."

 

 옆에 앉아있던 따님분 마스크 속에 엷게 번진 미소를 보니... 제가 설명을 잘못해서 생긴 케이스는 아닌 거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나이의 사람에게도 죽음이란 익숙한 주제는 아닐테니까요. 다만... 80대/90대의 환자들 중에는 이미 그 주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층의 80세 이태리 출신의 할머니 병실로 회진을 돕니다. 몇일 전 숨차다고 입원하셔서 CT 찍어보니 수 많은 전이성 암으로 추측되는 병변이 폐를 뒤덮은 경우였습니다. 이미 할머니의 만성폐쇄성 폐질환이 많이 심각해서 집에서도 산소를 달고 살고 계시던 분이셨습니다. 할머니가 겪으실 고난이 뻔히 보이는 경우였지요. 할머니는 진단과 치료 과정을 포기하시고 호스피스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할머니 회진을 도니까... 가족들과 전화를 하고 있던 할머니가 예의 인자하신 미소를 띄시며 한마디 하십니다.

 

할머니, "Sorry for the crazy Italian family talk"

나, "할머니, 괜찮아요. 가족들이 할머니 걱정해서 전화하셨나 보네요."

할머니, "나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될까? 나 소변 기계를 아마존으로 샀는데 그게 목요일에 배송이 된대... 나 병원 거 가져가도 내 꺼오면 그거 병원에 가져다 줄께..."

나, "제가 정확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간호사 선생님 불러서 같이 이야기 좀 들을께요."

 

수 간호사 선생님하고 같이 들어가서 할머니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역시 노련한 간호사 분 답게 할머니가 이야기하는게 purewick catheter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요도구 외부에서 부착해서 소변을 받아내는 기계) 그리고 그거 드릴 수 있을 거 같다고 할머니를 안심시켜 봅니다.

 

할머니, (눈물이 그렁그렁해 지시면서) 아무 때나 소변이 나와서 정말 얼마나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지 몰라... 이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뭐 좀 해 먹을라고 주방에 오래 서 있는 것도 너무너무 힘들었어. 내 아들은 아마 이런 내 상황은 이해하지 못할꺼야...

 

할머니가 많이 야위었지만 따뜻한 손길로 제 손을 잡아주십니다. 정말 고마워... 나 오늘 호스피스로 퇴원하면 Dr. W (할머니의 만성 폐쇄성 질환을 오래 돌봐드렸던 호흡기 내과 의사)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가네... 병원에서 다들 너무 잘해줘서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한마디 한마디 하시면서 숨에 차서 많이 불편하실텐데 따뜻한 미소와 제스쳐로 의료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순간 울컥해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은 덤이었구요. 수 간호사 선생님은 흑인이셨는데... 백인인 할머니를 꼭 안아드리는 모습을 보니. 세상에 넘쳐나는 흑백 갈등도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우리가 걸음마를 배우고 대소변을 가리기까지... 우리는 이 능력을 평생 아무 문제 없이 쓸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생각합니다. 늙어간다는 과정은 어찌보면 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던 능력들을 잃어가는 우울하고 힘든 일이지요. 우리가 이 능력을 익힐 때 부모님이나 그 누군가의 큰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은 신으로부터 댓가 없이 받은 능력이긴 합니다. 댓가 없이 받은 능력... 신이 반납해라 할 때 반납해야 하는 건데. 참 그게 쉽지 않은 부분이지요.

 

마음이 참 따뜻해지는 일요일이었습니다.

댓글 [41]

목록 스크랩

마일모아 게시판 [114,467] 분류

쓰기
1 / 5724
마일모아 사이트 맞춤 구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