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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파묘, 그리고 내 지갑

하나도부럽지가않어 | 2024.03.25 12:14:35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여보, 내 지갑 본 적 있어?"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평소에도 뭔가를 자주 깜빡깜빡하느라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질문이었겠지만, 그래도 친절한 나의 배우자는 언제나처럼 성심껏 대답을 해주었다.

 

"아.니."

 

";; 음, 이상하네, 어제 여행비 낸다고 여보가 내 카드를 빼갔던 게 마지막 같은데..."

 

기분이 쌔했다. 내 기분이 쌔한 이유는 아마도 어젯밤 구척장신 귀신이 나와 물고기 먹방을 하는 영화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파묘!"

 

그렇다. 어제 밤, 우리 동네에는 요새 핫하다고 하는 파묘를 개봉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던 나는 비록 심야 영화이지만 나의 배우자와 같이 이 영화를 시청했다.

 

"그런데 내가 어제 지갑을 가져갔던가? 아냐, 그랬을 리가 없잖아...?"

 

현실 부정과 동시에 마주친 배우자의 그윽한 눈빛에서 내가 이 지갑을 찾지 못할 경우, 파묘에서 나오는 장면들의 실사판을 보게 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그 영화에 나오는 관짝의 무게만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식은땀과 동시에 나의 겨터파크 또한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이른 개장을 해버렸다.

 

"어... 출근길에 한 번 들려볼게"

 

내 지갑에 있는 카드들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점심 사먹으려 넣어둔 월 $25 다이닝 크레딧의 본보이 카드, 그로서리 쇼핑할 때 네 배 받으려고 넣어둔 아멕스 골드, 그 외에 모든 거래에는 두 배를 주는 BBP...'

어쩌다 보니 아멕스 카드를 PPL하게 된 느낌이다. 재빨리 앱을 켜본다.

 

'recent purchases... 혹시라도 누가 내 지갑을 습득하여 기카라도 엄청 사진 않았을까?'

'하, 앞으로 또 상담원이랑은 대체 몇 시간을 통화해야 하나'

 

그동안 마모에서 읽었던 fraudulent purchases 호러 스토리들이 떠오른다.

 

다행이다, 최근 내역에는 카드를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의 한숨은 채 1초도 가지 못했다.

 

'아,현금!!!'

 

그렇다. 그동안 다이어트에 성공해 굶주린 채 슬림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던 나의 지갑은 최근 당근 쿨거래 후 상당히 벌크업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내 지갑을 찾는다 해도. 현금은 빼박 못 건지겠구나.'

 

선혈이 낭자한 파묘의 실사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간은 알코올성 지방간이라 별로 맛도 없을 텐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음, 최저 시급 받으며 일하는 친구들이 습득했다면, 얼마 안 되는 그 현금도 크게 느껴지겠구나. 그래, 지갑을 찾더라도 현금은 기부했다 생각하고 아쉽게 생각하지 말자'

 

문득 한국에 출장을 갔었을 때 생각이 들었다.
막차시간에 가까운 느즈막한 시간, 홀로 1호선을 타고가다 앞 좌석에 지갑이 하나 놓여져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자리만 남겨둔 채 자신의 핸드폰만 만지고 있었다.

 

'이걸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건가? 만약 누가 앉는 척 하며 슬쩍 가져가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 이 지갑을 역.무.원.에.게. 주.어.야.겠.다.!" 라고 주위 사람이 들릴 정도의 혼잣말을 하며 그 지갑을 주워서 그대로 역무원에게 주었던, 나 혼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었던 그 기억.

 

하지만 바로 고도의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평가된, 틀릴 리가 없는 나의 T의 자아가 말을 해준다.

 

'여긴 자전거 외에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엄복동의 나라, 한국이 아니야. 내가 잃어버린 지갑을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해.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지갑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꽤 있을 텐데'

 

투덜거리다 보니, 벌써 영화관에 도착해 있었다.

창구에 도착해서 입을 떼어본다.

 

"어제 마지막 상영한, 엑..에그.. 엨슈... 아 그 파묘 영화 본 사람인데, 어제 혹시 직원이 청소 중에 제 지갑을 습득했을까요?"

 

"메니저 오피스로 가보세요"

 

이미 내 겨터파크는 에버랜드 케리비언 베이 급이 되어 있었다.

 

"당신이 메니저 군요. 혹시 어제..."

 

"아 어제 지갑 잃어버리셨죠? 잠깐만요" 라며 메니저는 오피스로 들어갔다.

 

'어?! 정말 내 지갑이 있는 건가? 혹시 다른 동양 사람 지갑을 가지고 나오면 어떡하지?'

 

2분의 시간이 두 시간 처럼 느껴졌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손에 쥐고 있는 지갑은 과연 나의 것이 맞을까.

 

"아!!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찾아다녔어요"

 

"천만에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인사 후 등을 돌려 발걸음도 떼지 않은 채 지갑을 열어 보았다. 왠지 지갑이 얇게 느껴지기도 했다.

 

'...!!'

 

부끄러웠다.

나의 지갑은 단 1불의 돈도 없어지지 않은 채 고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리속에서 돌아다니던 그 많은 상상 속 직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급했던 나의 판단이 미안했다.

 

다시 메니저를 찾아갔다.

 

"죄송합니다. 얼마 안 되지만 제 지갑을 찾아준 직원에게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라며 정말 얼마 안 되는 돈을 건넸다.

 

"네, 전해줄게요."

 

밖으로 나오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 편협한 경험과 판단으로 이미 다 깨우치고 살아가고 있다 믿었던 이 세상은, 그래도 아직 살만한 곳이라고.

나 역시 남에게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고.

 

 

여보 묫자리는 이제 안알아봐도 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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