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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회사 gym에서 쌈닭된 썰

무지렁이 | 2019.02.20 09:53:05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들어가기에 앞서, 일단 제가 보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소싯적 욱하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미국 생활 초기(대학원 유학)에 학교 주차장에서 자리 싸움 나면 손가락 욕 같은거 하고

지나가다 누가 운전 이상하게 하면 쫓아가서 경적 울리고 또 손가락 욕 하고 그랬었죠. 

 

나이가 들고, 직장도 잡고, 영주권도 따고, 점점 risk-averse해졌고

첫째가 태어난 6+년 전부터는 주변에서 보기에 그냥 있는둥 없는둥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뭔가 애도 알아챌 정도의 대단한 손해가 아니면 그냥 넘어가고... 

암튼 성질 죽이고 사는 평범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꼭 필요한 사람 아니면 말도 잘 안 섞고 

같은 팀 사람 아니면 눈인사도 안 합니다. 

덩치는 아시안 치고는 큰 편이고, 인상은 더러운 편입니다.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어제 오후에 있던 일입니다. 

회사 gym에 갔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회사가 세들어 있는 고층빌딩 공용gym입니다.

 

요즘 길에 눈이 많이 질척거려서 duck boots를 신느라 gym에서 신을 운동화는 따로 가지고 다니는데

어제는 깜빡하고 운동화를 안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운동 안 할까 하다가 일도 많고 어깨도 뭉치고 해서 셀프 요가나 하자는 생각에 gym에 가서 운동복만 입고 맨발로 요가룸에 들어갔습니다.

 

요가룸에는 혼자 스트레칭 하는 사람들 3명과 PT받는 사람 1명, 그리고 그 사람 트레이너. 이렇게 5명 쯤 있더군요. 원래 거의 없는데 뭔일인지...

그래서 일단 여기 수업 있냐고 한번 물어보고, 요가 매트를 펼치려는데, 트레이너가 맨발로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좀 황당했습니다. 요가를 양말 신고 하라니요.

양말 신고 요가하는 사람들 못본 건 아니지만, 제 상식에서는 기본이 맨발, 양말은 옵션이라서요. (맞나요?)

 

약간 빡쳐서, 너 요가 수업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냐 했더니 있답니다. 

요가 수업에서 사람들이 양말 신고 하더냐 벗고 하더냐 물어봤더니, 그거랑 상관없이 여기선 그게 룰이랍니다.

아마 제 표정에서 빡치고 따지는 듯한 인상을 느꼈을겁니다.

(제가 한글로 써서 그렇지, 브로큰 잉글리시로 버벅대며 말해서 제 표현이 100% 전달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알겠다. 그래도 일단 왔으니까 이번엔 하고, 다음부터는 챙기겠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부터 따라야 된답니다. Sanitary issue 때문에 안 된답니다. 

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압적으로 들렸습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한 번 짓고 요가룸 밖으로 나와서 라커에서 양말 꺼내 신었습니다. 

 

그리고 프런트 데스크에 문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맨발로 돌아다니는 건 안 되는데 요가할 때는 벗어도 된답니다. 끝나고 매트를 닦기만 하면요. 

맨발로 돌아다니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다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 트레이너가 저를 제지한 이유가 돌아다녀서가 아니라 요가매트에 맨발로 올라가려 했다는 점이기 때문에 순간 빡 레벨 한 단계 올라갑니다. 

프런트 데스크에 있던 사람이 자기가 요가룸에 같이 가서 말해주랴 했는데, 

그 트레이너 다시 마주치기 싫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바로 옆 스트레칭룸이 비어 있기도 해서요.

여기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스트레칭룸에서 sun salutation을 한 20번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맨발로 돌아다는 건 잘못했지만, 내가 제지당한 이유 그게 아니지 않나?

이유가 비상식적이고, 매우 고압적이고, 다음부터 따르겠다는 말도 무시당하고...

빡 레벨이 한단계 더 상승합니다. 

요가를 완전 헛헸던거죠. 

마음을 가라앉히고 속세를 떨쳐도 모자를 판에 빡 레벨이나 올리고요. 

 

그러면서 최근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Model minority myth에 관한 글이었는데, 아시안들이 공부도 잘 하고 열심히 살고, 사회에 순응하고, 매사에 모범적이라는 편견도 일종의 racism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사고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이 인간이 왜 나한테 그러나? 내가 아시안이라서 찍소리 못하고 순응할 줄 알았나?

내가 백인이나 흑인이었어도 날 제지했을까?

내가 백인이나 흑인이었어도 다음부터 따르겠다는 말을 묵살했을까?

 

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그 트레이너가 아까 그 PT받던 회원과 스트레칭 룸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네가 틀렸던데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안 합니다. 여전히 자기 말이 맞답니다.

그래서 한마디 던졌습니다. 

너 racist냐?

이 질문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나가더군요. 

 

racist 발언 전인지 후인지,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도 나네요. 

자기는 자기가 보는 한도 내에서 누구한테나 똑같이 그렇게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거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요가 클래스를 관찰해서 맨발로 하는 사람 있으면 너한테 얘기할테니까 가서 쫓아내라. (유치하죠?)

그랬더니, 그렇게 하겠답니다. 

 

잠시 후, 매니져가 들어오더니 묻습니다. 

Is everything okay?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매니져 입장에서는 자기 직원에 대해 defensive하게 나오더군요. 

 

걔도 잘못했지만, 너도 racist라고 했다며...

그것도 자기가 딱 그자리에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좋은 excuse죠)

Racist도 심한 말이라고 쌍방 잘못이니까 넘어가자고 하네요. 

트레이너가 자기 입맛에 맞게 어떻게 전달했는지 모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쌍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30분 정도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따질까 싶다가, 다시 model minor가 되기로 하고 알겠다 하고 운동 조금 더 하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녁 내내 기분이 꿀꿀했었기에, 오늘 한번 여기에 정리해봅니다. 

 

제목에 쌈닭이라고 썼는데, 쓰고 보니 쌈닭까지는 아닌가요?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거든요. 폭력/물리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냥 미국 생활 초기에 좌충우돌 여기저기 부딪치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그 표현을 썼나봐요.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Racist냐고 물은 건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잘못한거 같아요. 그러면 어느 정도 잘못한건가요? 거기에다, 전술적으로도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또 잘못한 것 있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얼마나 잘못했나요?

 

그 트레이너가 잘못했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얼마나 잘못했나요?

 

제가 어떻게 반응했어야 @최선 이었을까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 제외하고요.

뾰족한 수가 있으면 따라해보고 싶습니다. 

단, 유창한 영어가 필요하다면 스킵! ㅋㅋ

아니면 그냥 다시 model minor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수 밖에요.

 

제 편들어주시가나 위로 받으려고 쓴 글 아닙니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고요, 객관적으로 쓸 수 없지만, 최대한 제 감정 배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글의 목적이라고 굳이 적자면, 사건을 복기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사람이고 더 나은 행동인가을 고민해보기 위함입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면 주저없이 써 주세요. 그래도 너무 세게 혼내면 울지도 몰라요.

다음에 만나면 사과할 의향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과할 때 하더라도 제 생각을 정리하고 사과하고 싶네요. 안 그러면 다시 또 한바탕할 수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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