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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지식인의 책무

절교예찬 | 2020.03.14 15:40:20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지옥불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자에게 예약되어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지기도했고, 혹은 J.F. 케네디가 단테의 권위만 빌려다가 창작했다고도 합니다만 저는 이 말을 <난.쏘.공>의 200쇄 기념 서문에서 조세희 선생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 쉽고 분명해서 무언가 추가할 필요성을 많이 느끼지 못하지만, 마일모아 게시판에서 '정치적인 논란'이 있을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중립'이나 반대로 '편향' 운운하는 댓글을 보면서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작고하신 리영희 선생께서 말년에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2005, <대화>, 임헌영, 한길사) 지식인의 정의를 "지식인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 개인에 대해서야 호불호가 있을터이니, 그분 말씀을 도그마처럼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선생의 저 말씀이 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 사회의 현안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거나 하나마나한 양비론을 들먹이거나 하는 것이 처세의 측면에서는 영리한 짓일지는 모르겠으나 한 사회의 지식인으로서는 직무유기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처음 마일모아에 발을 들였을 때, 저는 이곳 또한 다른 곳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서 순전히 자기들 재미로 남에게 정보나 지식을 전달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처음 한 달 정도는 별 죄책감없이 질문만 남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이곳에 모인 분들이 다른 사이트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그리고 저보다 훨씬 높은, 지식과 정보와 식견을 갖춘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속으로 심하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이래로 이곳에서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걸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제 말은 여기 마일모아에 모인 분들이야말로 대다수가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일본의 어느 학자는 또 지식인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학자는 결국 자기가 어느 편인지 선택을 해야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그건 학자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다.' (기억력에 의지한 관계로 직접 인용이 불가해서 작은 따옴표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장에 원문과 다른 다소의 의도치 않은 왜곡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지식인이라면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가치 판단을 해야하고, 거기에 대해 표명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겠죠. 싸움이 없으면 좋겠죠. 하지만 싸움만 없다고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은 우스개소리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사우스 코리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일본을 저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이전까지 일본도 정치적으로 어느정도 다이나믹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저런 조롱을 들어야할 정도가 되었죠. 그 내막을 적자면 마일모아님께서 서버를 늘려야될 정도가 될테니 각설하자면, 일본은 1980년대에 겪었던 큰 학원사태 이후로 대학생 혹은 그 근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저런 정치적 논쟁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어느 편인지를 커밍아웃해야한다거나, 모든 중립적인 분들이 사라져야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분들도, 그리고 이분들이야말로 정치 역학에서 모멘텀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분들이겠죠. 문제는 전혀 중립이 아닌분들이 자기 듣기싫은 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중립'이라는 도구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이죠.

 

"결지자도 충이요, 열지자도 충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결국 최명길의 말대로 청에게 항복문서를 쓰게 되자 김상헌이 이를 찢어버립니다. 이 찢어진 항복문서를 최명길이 다시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는 자도 있어야하고, 나같은 자도 또한 없어서는 안된다"고 한 일화를 두고 후세 사가들이 했다는 말입니다. 진짜 중립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듣기 싫으니, 혹은 게시판의 평화를 위해서, '정치적인 이야기 하지 마라'가 중립은 아니라고 봅니다.

 

끝으로 또하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은, 김규항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의 이름표가 좌로 두어칸 정도 밀려쓰여졌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김규항과 저만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만 어쨌든 어느 순간부터 보수의 이름표를 스스로 꿰차고 자기들은 보수라고 선언해버리고나니 나머지들이 다 두어 칸씩 좌측으로 밀린 느낌입니다. 그들이 만들어준 이름표대로 한다면 저는 일생동안 좌파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찾아본 어느 사전의 '좌파'에 대한 정의도 저의 정치성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사전적 정의대로라면 저는 진짜 뼛속까지 '보수'입니다.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 어느 한 권에서 '가든'의 정의에 대한 우스개소리가 나옵니다.

 

가든:

1. 정원 2. 숯불갈비집.

 

우리 나라의 '보수'나 '좌파'에 대한 정의도 해학의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처음 언급한 조세희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 사회는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사회'라고 선생은 말합니다.

또 다시 정치적 성향에 따라 '악'과 '선'의 f(x)에 들어갈 미지수가 다들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제가 대학 다니기 시작했던 1989년에는 운동하다가 잡혀가거나 심지어 의문사를 당하는 일은 흔했어도, '선'과 '악'의 구분은 매우 쉬웠습니다. 권력을 가진자들이 논리 대신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죠. 편하니까요. 근데 요새 보면, 민주주의 외치다가 잡혀가는 일은 거의 드물지만 대신 '선'과 '악'의 구분이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선'이 물리적인 힘을 얻는 동안 '악'도 진화를 한 결과겠죠. 이것이 바로 더더욱 '싸움'이라도 불사해야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게시판을 관리해야하는 마일모아님 입장에서는 괴롭겠지만 말입니다.

 

 

 

 

"전하, 신을 적진에 보내더라도 상헌의 말을 아주 버리지는 마소서"

 

"경의 말이 아름답다"

 

<남한산성,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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