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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의 집, 종이의 집 - 넷플릭스 드라마들

후지어 | 2020.06.09 14:53:46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스포일러 약간 있습니다)

최근 보았던, 그러나 보다가 말았던 드라마 2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 House of Cards - 소시오패스에 관한 실증적 보고서

 

그렇습니다. 정치 드라마라는 외피를 썼지만 본질적으로 두 소시오패스 (언더우드 부부)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추상적으로, 막연하게나마 어떤 인간인지 교양서에서나 접해보았던 소시오패스라는 인간형. 이들이 현실 세계에서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씩 헉! 하는 놀라운 장면을 만나게 될 것이고, 주인공들에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 소시오패스들의 악행에 비하면 수많은 드라마의 불륜남녀들은 귀여운 수준이고, <마인드헌터>의 살인자들은 차라리 순박하게 여겨집니다.

 

우리의 소시오패스, 프랭크와 클래어 언더우드에게 다른 사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체스판의 말에 불과합니다.

일단 낮은 단계, 설득부터 시작합니다. 이해관계를 이용해서 내 편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에 협박, 이간질, 거짓말 등의 다양한 기술이 들어갑니다.

이들에게 협조하면서 나만의 작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순간, 이 소시오패스들은 결정적인 뒷통수를 칩니다.

이렇게 관계를 정리하고 상대방은 멘붕에 빠지며 지금까지 이루어온 삶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교과서에 따르면 주위에 소시오패스가 있으면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합니다.

이 드라마가 주는 최고의 교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주위의 소시오패스를 조금이라도 이용해 먹을 수 있다는 건 교만입니다.

그저, 피하는 게 최선입니다.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하고 조그마한 거래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들의 장기판의 말이 되는 순간, 내 삶이 피폐해질 가능성은 너무나 높습니다.

 

저는 시즌 4 초반까지만 봤습니다.

이야기가 나선형을 이루면서 소재만 다를 뿐 비슷한 형식으로 전개되는 데에서 느낀 피로감이 가장 크구요,

대통령/UN 대사 자리에서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시오패스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정치에 대해 배우고 싶으시면 저는 차라리 <웨스트윙>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소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웨스트윙>은 교육방송에 가깝고 <하우스 오브 카드>는 인류학적 보고서에 가깝다고 봅니다.

 

종이의 집 Money Heist - 나를 돌아보게 만든 은행털이 드라마

 

Heist 영화는 제가 아주 즐겨 보는 장르입니다. 은행, 금고, 조폐공사, 카지노 등을 터는 이야기는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아도 여러분들도 많이 접해보았으리라 봅니다.

영화는 2시간 안에 계획, 실행, 도주 등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도둑과 경찰의 머리 싸움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깔끔한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종이의 집>은 시즌 1,2만 20시간이 넘는 드라마입니다. 이 긴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 넣어야 할까요?

계획 과정을 더 늘리고, 각 도둑들의 과거를 조명하며, 경찰과 한 수씩 주고받는 에피소드들은 이 드라마의 미덕이라고 봅니다. 짧은 영화에서 할 수 없었던 풍부한 이야기를 제공해 줍니다.

문제는, 도둑들이 조폐공사에 들어간 이후 벌이는 다양한 일탈 행위들입니다. 계획대로, 베를린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맡은 바 일들을 한다면 거액을 챙겨 남은 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둑들은 자꾸 엉뚱한 일들을 벌입니다. 완벽했던 계획이 실제 실행 과정에서 하나하나 어긋나기 시작하고 급기야 우리의 '교수'까지 무리요 경감과 사랑에 빠지면서 심리적 나약함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드라마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둑들이 자꾸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 계획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에 이미 지쳤는데,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며 냉정하게 사태를 이끌어가야 할 교수까지 이러니 저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지고야 말았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드라마,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가는 드라마 라면서 시원하게 욕 한번 해주고 뒤돌아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왜 도둑들의 행동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일확천금이 눈 앞에 있는데 자꾸 반대 방향으로만 가는 도둑들이 이해가 가지 않고 분통이 터질까?

그건 내가 돈을 참 좋아하는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텐데... 저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순간의 감정 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충실하게 계획대로 행동할텐데... 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뜬금없지만, 은행털이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더군요.^^

 

<종이의 집>을 더 볼 생각은 없습니다.

결말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감상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클 것을 알기에, 여기서 그만 두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이야기에서 고통을 느끼는지를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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