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eMoa
Search
×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1. 안약

사리, 2014-07-31 02:43:31

조회 수
1207
추천 수
0

서막은 늘 눈꼽으로 시작된다. 너무도 정확하게 짙게 구획되어 있어, 처음 보는 사람들이 종종 눈화장 하고 다니냐고 묻는 다크써클과 함께 이 조폭 쉐입 혹은 간첩 쉐입이라는 소리를 듣는 내 눈을 씨뻘겋게 충혈시켜 무장공비 영화의 공비3이라는 역할을 충분히 하게 만들 것 같은 그 심란한 눈. 충혈의 원인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알레르기성 결막염.

요며칠 눈이 안떠질 정도로, 떡시루에 붙여 놓은 쌀반죽처럼 눈을 덮어버리더니 오늘은 드디어 왼쪽눈이 붓기 시작했다. 약이 없으면 핏물처럼 번지는 두 눈덩이를 부여잡고 살아야한다.

평생 갖고 산다고 생각하세요. 8년전 신촌의 안과 의사는 자기 캐리커쳐가 그려져있는 안경처방전과 스테로이드제가 들어있는 안약을 처방하면서 선고했다. 혹시 책 읽을 때 머리 아프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네 그런데요 왜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난시가 이렇게 심한데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겠어요?라길래 환하게 웃으면서 제가 책 읽을 때 머리가 아픈 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눈이 나빠서였군요라며 좋아했다. 그는 눈알을 한바퀴 굴렸지만... 물론 지금은 눈도 나쁘고 머리도 나쁜 걸로 판명 났다. 그는 안과 의사이니 눈만 얘기해준 거였다.

한국서 상비약을 가져 올 때 안약을 처방 받아오는 걸 깜빡했다. 캄보디아에서도 싱가폴에서도 의료보험 없는 인생으로 쉽게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친구녀석이 이 동네에 한국 약국이 있단다. 그리고 갔다. 희미하게 기억하는, 두 개의 안약 중에 염증을 가라 앉히는 약이름을 기억해냈다. 오큐메토론, 삼일제약. 그 성분의 약은 없단다. 대신 급한 불 끌 요량으로, 안티히스타민이 들어있는 베트남제 안약 하나를 들고 왔다. 그 안약의 성분은, 종합 선물세트였다. 항생제도 살짝 들은 것 같고, 안티히스타민은 물론이요 비타민까지 들은 안약계의 종합감기약이었다.

치과보다 무서운 건 안약을 넣는 것이다. 조삼모사를 인생의 철칙으로 아는 나는, 내 눈앞에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게 그렇게 무섭다. 내가 못보는 입속에서 일은 그냥 남의 일 같다. 내 손으로 안약을 넣질 못해 누나나 친구가 대신 넣어줘야했다. 마지막 누나는 늘 안약을 넣어줘야 할 때면 "이 바보같은 놈은 안약도 지 손으로 못넣어"라며 쥐박았다. 염증이 가득한 눈에 염증파이터들이 공급되는 순간 눈은 불을 집어 삼킨 것 마냥 따가워진다.

홀로 앉아 안약을 넣어봤다. 나도 내 혼자 스스로 안약도 넣을 줄 알아야하는 나이이고 상황이다. 심장이 뛴다. 눈에 안약 꼬다리가 가다온다. 질끈 감는다. 마음 고쳐먹고 다시 떠 본다. 이 작은 눈에 제발 저 안약 두 방울이 제대로 착지하게 해주소서라며 기원한다. 어디선가 나희덕 시인은 "이파리의 일생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는 낙법에 달려 있다"라는, 그 시집을 통틀어 딱 그 한줄만 감정 이입되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어디 이파리 뿐이겠는가. 지금 내 앞의 안약도 그러하다. 나희덕은 이파리가 어디에 착지하든 상관 없다고 했지만 이 안약은 아니다. 양학선 2와 같은 기술을 부리지 않아도 제대로 착지만 하길 간절히 바랬다.

물론 결정적 순간에 나는 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도 살짝 안구와 접선은 한 듯 하다. 눈알이 쓰라려 온다. 그런데 이 안약, 녹색이었던 게 처음부터 의심이 갔는데... 멘솔향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쓰라린데 멘솔까지 어택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일찍이 인생은 호사다마가 아니라 그냥 다마다마 아니던가. 이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난 성인이니깐. 하지만, 하지만, 내 머리위에 있던 선풍기가 고개를 젖히더니 내 눈 앞으로 바람을 푸악 쏟아낸다. 싸울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화난 다고 주먹질 해봤자 허공에 허우적대는 미친 짓이다. 눈알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이 작은 뱁새와 베틀할 눈이 @.@ 됐다.

이 안약에 멘솔 넣은 작자를 꼭 찾고 싶다.
안약은 구강청정제가 아니다.
공장은 베트남에 있다.

14 댓글

마일모아

2014-07-31 02:54:26

아픈 눈을 부벼가면서 장문의 귀한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 필력이면 두달이면 논문도 탈고하실 기세군요. @@ 

무선쿨

2014-07-31 03:38:47

ㅋㅋㅋㅋㅋ

모밀국수

2014-07-31 03:56:48

캬- 이건 또 몇편짜리 시리즈인가요~ ㅎㅎ 

쌍둥빠

2014-07-31 04:03:48

만병통치 안약을 넣으셨으니 이제 곧 시력도 좋아지시고, 공간 인지도 잘 하시고, 머리도 잘 돌아가실거라 믿습니다!

쿨쿨

2014-07-31 06:17:05

아.. 이건 마치 내 눈에 물파스를 바르는 듯한 느낌이야! @@


오렌지 사진을 보면 침이 고이듯이, 이 글을 읽으니 눈물이 절로 나는것 같습니다. 

edta450

2014-07-31 07:56:59

으... 텍사스 소떼처럼 몰려오는 따가움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필력입니다.

오늘따라 납량특집글 많이 올라오네요(...)

기돌

2014-07-31 08:04:51

전체적으로 읽는 내내 뭔가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여행 잘하고 계신거죠?^^

책 내셔야겠습니다. 알라스카에서 알아봤지만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말괄량이

2014-07-31 11:14:42

읽고나니 제눈이 다따갑네요. ㅜㅜ

순둥이

2014-07-31 11:16:41

살아본적은 없지만 70년대 소설의 한장면 같습니다 ===3=3 화장실에서 세수, 아니 눈 씻고 왔습니다 ^^

narsha

2014-07-31 16:36:58

안약 땜에 힘드신데 죄송한데요. 소설가이신 것 같습니다. 느낌이 소설 한 챕터 읽는 것 같았어요....

항상고점매수

2014-07-31 18:02:48

작가하시면 글 잘쓰실것 같아요! 혹시 작가이세요?

papagoose

2014-07-31 18:30:36

소설같은 실화는 그렇다 치고...


그래서 눈은 나아지셨는가요? 웃으면 안되는 시츄에이션인데... 왜 이리 웃겨요? 사리님 모습과 눈 감고 주먹질 하는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면서 무쟈게 웃겨요.. ㅋㅋㅋ

능력자

2014-07-31 18:58:28

이글 읽고 방금 맨솔 들어있는 안약 넣고 왔습니다. ^^ 

갑자기 제 눈이 가려워지고 피곤해질 정도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디테일한 묘사하며, 안약의 그 느낌까지.. ㅎㅎ 

apollo

2014-08-04 09:31:21

사리님 눈에 은총을.... 

안타까운 사연임에도 왠지 느낌 가득한 감동이^^

목록

Page 1 / 3839
Statu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마적단의 기초 | 검색하기 + 질문 글 작성하기

| 정보 33
  • file
ReitnorF 2023-07-16 37458
  공지

게시판의 암묵적인 규칙들 (신규 회원 필독 요망)

| 필독 110
bn 2022-10-30 60659
  공지

리퍼럴 글은 사전동의 필요함 / 50불+ 리퍼럴 링크는 회원정보란으로

| 운영자공지 19
마일모아 2021-02-14 81002
  공지

게시판 필독 및 각종 카드/호텔/항공/은퇴/기타 정보 모음 (Updated on 2024-01-01)

| 정보 180
ReitnorF 2020-06-25 199172
updated 115160

코스코 마사지 체어 구입 직전 입니다. 조언 부탁드려요.

| 질문-기타 15
아버지는말하셨지인생을즐겨라 2024-06-07 1811
new 115159

5월 Banff 여행기

| 여행기 44
  • file
달라스초이 2024-06-10 1684
new 115158

알뜰폰 USIM(유심)->eSIM(이심) 변경 팁 (미국 아이폰 15)

| 정보-기타 6
777 2024-06-10 136
new 115157

저의 근시안적인 사고를 넓히기 좋은 방법이 뭘까요?

| 잡담 44
복숭아 2024-06-10 1625
updated 115156

시카고 공항 환승 시간 (국제선)

| 질문-항공 40
COOLJR 2023-12-17 2379
updated 115155

초보자를 위한 코너: 아무거나 물어보세요 + 아무나 답변해 주세요

| 잡담 3455
  • file
shilph 2020-09-02 77235
updated 115154

Hyatt Club Access Award 나눔은 이 글에서 해요.

| 나눔 781
Globalist 2024-01-02 19197
updated 115153

2024 6월 문호 f2a final action date 진전 나머지 동결 eb2/3는 다음달 추가 후퇴예고

| 정보-기타 253
bn 2022-10-11 46646
new 115152

제경우에 교통사고 소송 Deposition 할때 통역사 필요할까요?

| 질문-기타 8
x세대 2024-06-10 337
updated 115151

[문의/도움 요청] Vegas 기점으로 그랜드 캐년 주변 돌아보는 2박3일 일정

| 질문-여행 29
Parkinglot 2024-06-08 872
new 115150

태국 콘래드 코사무이, 밀레니엄 힐튼 방콕 후기

| 후기 1
  • file
포인트헌터 2024-06-10 350
updated 115149

UR 포인트 파트너에게 트랜스퍼하는게 안되네요

| 정보 2
네모냥 2024-06-08 744
new 115148

셀러마켓에서 지인에게 에이전시없이 집구매하는것이 좋은기회인가요?

| 질문-기타 19
주누쌤 2024-06-10 873
new 115147

매리엇 본보이 바운드리스 에서 리츠로 업그레이드 할때 두방치기?

| 질문-카드
Junsa898 2024-06-10 68
updated 115146

DoubleTree by Hilton Seoul Pangyo Residences 5월 오픈 예정이네요 (더블트리 판교)

| 정보-호텔 10
히피 2023-02-05 1188
updated 115145

엠버시 스윗 힐튼 나이아가라 폭포 30층? 40층? 선택장애 도와주세요

| 질문-호텔 22
  • file
언젠가세계여행 2024-05-22 1818
new 115144

한국에서 $800이상 고가물건 구매 후 미국 입국시 세관신고 방법이 궁금합니다

| 질문-기타 8
여행이좋아요 2024-06-10 841
updated 115143

크레딧카드 사인업 관리 정리 Google Sheet

| 자료 5
visa 2024-06-09 1332
updated 115142

9시간 레이오버 타이페이 정보 및 경험담 공유

| 정보-여행 8
longwalk 2024-05-21 1367
new 115141

아멕스 카드 다운그레이드 할때요!

| 질문-카드 3
바닐라스카이 2024-06-10 221
updated 115140

언제 사프 다운그레이드하는 게 좋을까요?

| 질문-카드 28
꼬북칩사냥꾼 2024-06-06 2768
updated 115139

자동차 리스 정보

| 정보-기타 134
  • file
업스테이트 2018-02-24 29890
updated 115138

미국 딸기랑 블루베리는 역시 이게 최고네요

| 정보-기타 17
  • file
Como 2024-06-09 9041
updated 115137

현대 소나타 (64,000 마일): 딜러에서 하라는거 해야될까요?

| 질문-DIY 32
  • file
삐약이랑꼬야랑 2024-06-08 2558
updated 115136

대한항공 마일로 JFK-HNL(or OGG) 마일리지 표가 안보여요 (feature 메리엇 포인트 트랜스퍼)

| 질문-항공 12
  • file
돈쓰는선비 2024-06-09 968
updated 115135

미국 1년차 카드승인 기록

| 후기-카드 8
딸램들1313 2024-06-09 889
updated 115134

2024년 5월 마우이 여행 후기, 화재 피해지역 라하이나 짧은 정보 (스압)

| 여행기-하와이 20
  • file
미국형 2024-06-09 1875
updated 115133

아이오닉5 클리어런스로 리스하는 방법(1월까지)

| 정보-기타 143
첩첩소박 2024-01-13 14906
new 115132

교통사고 관련 조언 부탁 드립니다: 상대방 100% 과실 받기가 힘들까요?

| 질문-기타 5
김감전 2024-06-10 875
updated 115131

사리/사프/체이스 doordash 60% off x3

| 정보-기타 18
  • file
삶은계란 2024-06-06 3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