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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여행기]
세계일주, 마일을통한. 13. 못다한이야기 - 클로징카멘트

김미형 | 2013.03.05 04:09:43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13.  못다한이야기 - 클로징카멘트

 

차례


1)     여행개요및 준비
2)     ~ㄹ발런던
3)     자유 - 암스테르담
4)     자연의 선물 – 노르웨이1
5)     자연의 선물 – 노르웨이2
6)     중세의 도시 – 탈린그리고 헬싱키
7)     차르의 도시 – 상트 페테스부르크1
8)     차르의 도시 – 상트 페테스부르크2

9)     차르의 도시 – 상트 페테스부르크3
10)   붉은도시 – 모스크바
11)   일본의 역사 – 교토일본의 부억 – 오사카
12)   살짝 충격 – 토쿄


마지막편을 일부러 따로 올리는 이유는 그렇게 내세울게 없는 여행기에 무슨 대단한 클로징 카멘트’ 를 할려고 하는게 아니고 이전의 여행기들을 순수하게 여행기로 남겨놓고 여행중에 느꼈던 여행과 약간다른 얘기를 해볼까 해서입니다그런데 쓰다보니 일이 커져버렸습니다써놓고 올리려고보니 이건 도저히 마모싸이트에 맞지않을뿐더러 양이 아주 방대해져서 잡곡님과 기스님 그밖에 다른분들의 압박에도 어떻게 올리지않고 그냥 넘어가려했습니다유자님의 반어법을 사용한 압박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지만 이 또한 넘어가려 했었죠.  그리고 얼마전에 절교님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이 얘기는 아시는 마모분들도 많지요.). 진도 미역에계룡백일주에 절교님의 정이 듬뿍담긴 선물이었습니다책 안에는 주옥같은 내용이 있었고 제가 올리려는 글과 상통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서 읽고난후 용기를 내어 마지막 여행기를 올려봅니다어쨌든 약속된 여행기였으니 올리기는 해야지만요

 

그렇지만 내용은 역시 깁니다크게 네조각으로 나뉘어져있는데첫번째편은 이전 여행기에서 빠진 뒷얘기들이고 두번째는 고조선의 유적들 (중국의 동북공정), 세번째는 일본에 흩어져있는 우리 문화유산들네번째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있는 일본의 박물관들 로 되어 있습니다길다고 짜증내지 마시고 첫번째편과 제일 끝 마지막 몇문장만 읽어 주십시오나중에 생각나면 조금씩 읽으시는게 좋을것같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역사에 대한글은 제 개인적인 견해가 대부분이고 여기에계신 많은 분들께도 불편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세부적인것은 맞지 않는것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큰 맥락은 틀리지 않았으면 합니다마지막으로 이글에대한 주 목적은 저의 미래의 여행지’ 입니다읽으실때 다른 생각이 들더라도 이점을 생각하고 읽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1. 총경비

마모사이트에 종종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아니면 아직 학생이신 분들의 얘기가 올라오는게 보였습니다그시기를 저도 치열하게 살았지만 불행이도 저는 그때 마모사이트와 같은 이런 정보를 접하지 못했습니다인터넷 자체가 활발하지 않을때였지요돈없고 시간 없으나 여행을 좋아하는 유학생에게 할수있는게 고작 하루에 열몇시간을 운전하면서 Motel6 를 이용하는거였습니다사실 여행계획을 세울때 공짜로 세계일주’ 라는 그럴사한 이름을 붙여서 그런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만 막판에 캐피탈원 이 배신을 하는바람에 호텔항공료를 제외한 부분은 지출이 불가피했읍니다그래도 비지니스 티켓호텔 라운지공항 라운지 등을 이용해서 먹는거의 6~70% 는 해결한거 같습니다여행기간중 저희 세식구가 쓴 총경비를 계산해보니 $3,500 정도 됩니다.  원월드의 RTW 를 이용해 저희 루트의 티겟가격을 계산해보니 세사람이 $43,000 이 나오더군요지금은 더 비싸겠죠. 15일 동안 저희들이 사용한 호텔은 아무리 싸게 계산해도 $2,000 은 될것같습니다결론은 $48,500 짜리 여행을 $3,500 가 된거죠..

 

2. 환전

여행후 환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합니다여행기 첫번째편에 환전에 대한 정답을 모르겠다고 썼는데 그 이후 얻은 몇가지정보를 얘기해볼까합니다우선 환전을 할수있는 몇가지 방법은

1.    주거래 은행에서 외국환 구입

2.    Amex TC

3.    공항 환전

4.    ATM (with no FOREX card)

다 아시겠지만 이중에 정말 피해야 할것은 3번입니다환율도 않좋고 fee 도 이중으로 나갑니다그리고 환율면에서는 TC 가 좋을듯합니다. LHR 같은 경우는 공항에 바로  AMEX 지점이 있어 좋을듯합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은행을 찾아야한다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외국환을 사는 경우는 미리서 모든경비를 계산해서 맞추기 힘들기 때문에 이것도 완벽한 답이 될수 없습니다외국환 구입이나 TC 사지 못한경우는 Chase 카드(UA 카드를 제외를 이용해서 ATM 을 사용하시는게물론 fee 를 지불하지만공항환전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방법보다 좋은것은 Charles Schwab checking account 입니다.


 checking account 는 말 그대로 free 어카운트입니다전세계 ATM 사용료가없고 만약 fee 가 붙으면 그걸 reimburse 해줍니다그리고 위에 그림에 보다시피 첵킹 어카운트에  balance 가 없어도 fee 가 붙지 않습니다그냥 첵킹 어카운트로 사용해도 좋을듯싶습니다


3. 워크아웃

이건 정말 잡답입니다이런 종류의 여행에서 또하나의 혜택은 건실한 체중감량입니다일부러 줄일려고 하지않아도 이 주일이 넘게 걷고 또 걷고 하다보면 몸무게가 줄어들지 않을수 없습니다겉은 비슷한데 몸무게가 빠집니다아주 가벼운 느낌입니다.

 

4. Novodevich

러시아 여행중 Novodevich안에서 찍은 사진중 이름을 몰랐던 작고 예쁜 성당 이름이  Prokhorov Chapel 이라고 합니다지금봐도 이쁩니다.

 

또한 그옆에 있는 유명인사들의 무덤을 찾을때는 아래 사이트에서 몇군데 미리 알아보고 가는게 좋을듯싶습니다넓고 모두 러시아어라서 당최 찾을수가 없습니다.     

http://www.findagrave.com/cgi-bin/fg.cgi?page=cr&CRid=639684&CScn=novodevich&     


마지막으로 노보데비치 앞 호수는 노보데비치쪽보다 호수 건너쪽에서 보는게 더욱더 백조의 호수를 연상케합니다.

 


5. 암스테르담-커피하우스

저번에 올리지 못했던 암스테르담의 커피하우스 메뉴입니다.

 


6. 여행지 매그넷

저희는 여행을 갈때마다 그곳의 매그넷을 하나씩사옵니다가끔씩 들여다보면 그때가 생각나 잠시 행복해집니다요즘은 깜빡깜빡해서 정신을 차리지않으면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냉장고 벽이 꽉차서 오래된 한뭉테기는 서랍안에 있습니다보면서 어디인지 맞추는재미가 있을것같아 큰 사진으로 올려봅니다.

Magnet.jpg 


7. 고조선의 유적 - 중국의 동북공정

4~5 년전 대만의 국립박물관을 간적이있읍니다큰벽에 중국과 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연도와 함께 그려놨는데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고조선은 물론이고 고구려란 나라를 아예 빼버렸더군요그러니까 한반도는 백제와 신라부터 시작하는걸로 되어있었습니다정말 큰 충격이었읍니다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의 역사왜곡과 식민사관을 그대로 전수받은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의 완벽한 결과물이 아닐수없습니다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은 일제 식민사학자의 대표적이라 할수있는 스다 소우키치’ 의 제자들이거나 그의 영향을 받은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해방후에도 이들이 강단에 서서 그들의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들의 제자의 제자들이 아직도 주류를 이루고있습니다누구를 탓하자는게 아닙니다마적단분들중 많은분들이 석사박사 학위를 하셔서 아실겁니다자기 스승을 거부하고는 학문을 계속할수가 없죠다른데로 옮겨도(지도 교수를 배신’ 하면 받아주지도 않지만마찬가지입니다그러니까 우리는조금 극단적으로 표시하면일본의 식민사학을 학교에서 배워올수밖에 없었던 겁니다일본의 학자들이 해방후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돌리려면 100년은 걸릴것이다.” 라고 했다는군요대부분의 한국분들이 이런사실을 모르고 있었읍니다저도 그렇구요고등학교다닐때 한 친구가 자기는 사학과에 가서 한국역사 기록을 좀 바꾸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얘가 지금 뭔소리를 하는지 그저 대학가기도 바쁜데’ 했었죠창피한 마음으로 고조선 역사를 다시 봤읍니다우리의 고조선 역사를 찾고 지키려는 분들이 많더군요참여는 못하지만 그냥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a.  만리장성

중국의 만리장성은 진나라때 쌓은것으로 알고있지만 실은 지금 보이는 대부분은 명나라때 증조한것입니다어쨓든 이 만리장성의 기점이 산해관(산하이관)’으로 알려져있습니다.아래그림의 검정선이 그동안 알려진 만리장성이죠



이게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압록강까지 끌어다놨습니다 (위그림의 갈색선). 이곳은 고구려의 박작성이 있는곳입니다박작성을 이상하게 복원해서 만리장성으로 만들어 놨습니다그러나 숨길수 없는 고구려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하지만 세계 각나라의 교과서위키피디어내셔널 지오그래픽 하나같이 아래와같이 그려져 있습니다.


몇달전 중국은 다시 만리장성을 엿가락 늘리듯이 늘렸습니다. 8,800km 에서 21,110km 로 두배이상 늘어났습니다 (위 그림의 빨간선). 만리장성이 이만리 장성이 됐습니다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의 결과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중국이 이렇게 할수있도록 단초를 제공한것은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이었습니다우리나라 사학계의 지주라 할수있는 이병도는 이를 청천강까지 끌어다놨습니다사실 또다른 식민지 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것이죠그런데 그이유가 참으로 이해할수없습니다사마천이 쓴 사기에 만리장성의 기점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 이다라고 했는데 황해도 수안군의 ’ 자가 같다고 이곳이 기점이라고 이와기치가 주장한것을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이 그대로 믿고 있는것입니다신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수안군은 고구려때 장색현’ 인데 고려초기 수안’ 으로 고쳤다고 나와있습니다사마천이 사기를 쓸즈음에 수안’ 이라는 지명이 아예없었는데도 이걸 아직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어떤사람들은 만리장성의 기점을 아프리카 수단이라고 우기고 (비꼬고있습니다같은 ’ 자가 들어간다는거죠중국에서 이걸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겠죠아마도 언젠가는 아래와 같이 되리라봅니다.


우리나라 주류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을 주장합니다자기들끼리 이렇게 정해놓고 나중에 다른사람이 그게 아니다라고 하면 물증을 제시해야 됩니다고구려때 수나라와 당나라를 막기위해 쌓았던 고구려성들 (천리장성)이 중국이 오랑캐를 막기위해 쌓은 만리장성으로 둔갑하고있습니다수나라의 백만대군당나라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성들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될수가있을까요고조선 영역과 한사군의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위 만리장성의 기점은 낙랑군의 위치와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또한 대방군의 위치를 이병도는 단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국의 한서지리지에는 대방군이 둔유현’ 에 있다고했고 둔유현’ 과 고려사지리지의 우동어홀’ 의 가운데 동어’ 와 발음이 비슷하다라는이유황해도 황주(고구려때의 이름이 우동어홀)로 단정했습니다참으로 황당하죠둔유현과 우동어홀이 어떻게 같은 지명이 될수 있습니까이런걸 지금 논문을 내면 통과가 될까요불행하게도 그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죠이건 그의 스승인 쓰다 소우키치가 주장한것이고 그의 의도와 맞아 떨어진 것이 였으니까요.

 


위 사진은 중국의 심양에있는 요녕성 박물관에 있는 그림입니다중국의 의도가 이런것이겠죠섬뜻합니다북한이 붕괴되면 중국이 자기땅찾으러온다고 들어올수도있습니다그런데 청천강 지역을 제외하고 어차피 현재 중국땅인데 중국이 왜 이럴까요이게 그 이유의 전부가 아니겠지만 아래 요하문명을 보시면 의도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b.  요하문명

중국의 역사관은 대대로 화족이 대륙의 중앙에있고 서융남만북적동이의 오랑캐들에 둘려 쌓여있다고 되어 있었고 우리도 그렇게 배워왔습니다그 오랑캐를 막기 위해 쌓은성이 만리장성이구요만리장성 밖은 다 오랑캐로 규정했죠그런데 80년대부터 요하 지역에서 엄청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우리가 배워왔던 4대 문명보다 1000년정도 앞선 이문화는 세계5대문명으로 등재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사실 이보다 앞서 장강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하모도문화)이 발견되기는 했습니다만 이곳은 어차피 중국땅 안이니까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였습니다그런데 요하문명이 만리장성 밖에서 발견되자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사상이 흔들리게됩니다이에 중국은 새로운 국가관으로‘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습니다‘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인데 그 핵심이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 요하 문명은 우리의 고조선이 있던 그곳의 바로 우리의 문화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은 고조선과 관련이 많습니다.


i.              적석총

홍산에서 발견된 적석총은 큰건 60X60 m 라고 합니다이 적석총들은 BC 3000 년에 세워진것들이라고 합니다이런 적석총들은 고구려로 이어져서 한반도와 일본에서 발견되지만 중국(만리장성이남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우하량 적석총


ii.              옥기

단단한 옥으로 BC6000 에 만들었습니다우리가 알고 있던 신석기 (타제마제 석기시대에 이런 옥을 만들었던겁니다옥으로는 연대측정이 불가능하지만 같이 발굴된 인골로 이런 측정이 가능합니다이런 옥을 추적해본결과 압록강 주변의 수암이 본 고장이라고 합니다이것과 비슷한 옥들이 한반도의 문암리와 여수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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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륭하에서 발견된 인골과 옥결


여수에서 발견된 인골과 옥결


iii.              비파형동검빗살무늬 토기

우리가 익히 배웠던 비파형 동검과 빗살무늬 토기 역시 하가점 하층문화(요하) 에서 대량으로 발견됩니다이들은 요하지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되지만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비파형 동검 출토지역


iv.           치를 갖춘 석성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에서만 발견된 석성입니다성을 공격하는 적을 삼면에서 공격할수있는 획기적인 성의 구축 방법입니다그런데 이게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됩니다

하가점 하층문화                                        고구려 백암성


v.        채도 존형기

        BC5000 년에 만들어진 이토기 역시 중원에서 발견되지 않는 형태의 토기입니다. 7000년 전 토기에 저런 문양을 넣는다는게 믿을수가 없습니다.


채도 존형기


vi.       치아 수술


아래그림은 BC 6000 년의 두개골입니다이게 2004년 발견됐는데 일본학자들이 이 두개골을 가지고 4년 고민한끝에 2008년 인공적인 치아 수술흔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현미경 사진결과 나선형의 연마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BC 7000년 에 행해진 두개골 수술흔적은 발견된적은 있지만 치아수술은 이게 가장 오래된것이라고 합니다.



vii.      여신묘

요하문명의 중심인 홍산에서 여신묘가 발견되었는데 눈은 옥을 갈아서 넣었고 크기는 사람의 2, 3배정도입니다그리고 그옆에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 발다닥도 함께 출토가 되었습니다이곳 홍산인들은 곰 토템족이었다는 증거가 될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역사를 중국은 자기의 역사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마천도 사기에서 신화로 치부한 3 5제도 이제 역사로 끌어들이고 황제(3황중의 하나)의 본거지를 중원에서 요하로 옮기면서 동이족도 다 황제의 후손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그러니까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겻가지일뿐이고 우리의 뿌리를 아예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이죠치우와 단군을 포함해서조금 과장하면 북한을 취하고 자기들의 역사라고 할수도 있겠죠?
중국은 지난해 2011년 6월 옌볜의 아리랑가야금씨름랴오닝성의 판소리 등을 제3차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그 이전에는 환갑례전통혼례한복농악무 를 등재 했었죠이건 자국내 소수민족 보호 차원이라고 합니다만 농악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였습니다아리랑을 한국과 공동으로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하려고 한국정부에 건의 했다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각나라의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야 한다는군요그리고 일년이 지나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수 있구요. 이를 안 한국정부는 올해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하겠다고 했지만 중국도 동시에 신청할것이라고 합니다그런데 한국 문화재법이 묘해서 무형문화재의 보유자나 보유단체가 있어야 문화재에 등록이 된다고 하는군요그 많은 아리랑중에 정선아리랑만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됬다고합니다이법을 보완한다는데 국회에서 재대로 처리 되겠죠?

 

한국정부는 2006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해 고구려 연구재단을 병합해 동북아 역사재단을 만들었습니다물론 작은 이익은 있었겠지만 하고 있는일이 중국일본이 주장하는걸 확인하는 일들을 하고있을 뿐입니다.
중국은 사회제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한 뜻으로 동북공정에 참여하고 있다고합니다그 수 또한 엄청나고 자료 공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아직 양심있는 학자들도 많이 있고 자료들이 많이 연구 되어졌기 때문에 우리것을 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얼마전 중국이 개발해 진수한 첫항모의 이름을 랴오닝함으로 붙였습니다이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중국을 여행하게되면 이곳을 걸어보고싶습니다우리의 조상들이 시원이었던 이곳조상들의 숨결이 있던 이곳중원에 굴하지않고 오히려 호령하려했던 이곳을


8. 일본속의 한국한국문화재
일본도 마찬가지였읍니다일본 강점기때 끈임없이 우리의 고대역사를 줄이고 일본의 역사를 늘려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 하려했던 일본 사학자들과 거기에 동조하고 그사람들의 주장을 그대로 물려받은 한국 사학자들이 그려놓은 고대 한국의 지도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아 떨어져 요동 서쪽에 있던 만리장성이 압록강 까지 와 있읍니다우리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인 홍산문명도 당연이 중국으로 포함되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고조선도 중국의 제후국에 포함되는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중국의 내전이라고 하고 있구요일본도 덩달아서 광개토대왕비에 (시멘트를 발라훼손하고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면서 이에 맞장구를 치고 있구요한국의 사학계는 왜 우리의 목소리가 없을까요이러한 동북공정은 간도 문제와 연결되어있고 북한과의 관계까지 꼬여있어서 풀기기 쉽지 않아보입니다그러나 우리가 고구려의 옛 성들을 방문하는데 그곳에 버젓이 이곳은 만리장성입니다’ 라고 쓰여져있는걸보면 마음이 편할 한국분들은 없겠죠.
지금 한창 반환운동중인 이천 오층석탑에 대해 얼마전 이범관 새누리당 의원(경기 이천·여주신문에 난 얘기이므로 실명을 사용합니다.)이 일제가 약탈당한 이천 오층석탑에 대해 "한국전쟁 때 유실될 수 있었는데 일본이 잘 보관해줘 고맙다"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정치하는 사람들이 우리것을 찾아주리라는 무리한 상상은 이제 그만해야 될듯싶고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는 힘들겠지만 잊혀지기전에 적어도 우리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의 내용은 많은 부분이 인용된것들입니다.)


  a.  구다라

오사카지역에는 ‘백제(百濟)’ 라는 이름이 많습니다일본어로는 구다라’ 라고 하는데 백제를 일본어로(이런 경우 보통 음독으로읽으면 햐쿠 사이’ 가 되어야하는데 왜 구다라’ 라고 발음을 할까요이는 백제의 고어 큰나라’ 에서 연유된것이라고 합니다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백제를 큰나라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됩니다예전에 백제인들이 살았던 ‘백제주(百濟洲구다라스くだらす)구다라역(〃驛), 구다라왕신사(〃王神社), 구다라사지(〃寺趾등등 백제 자취가 이곳저곳에 뚜렷합니다


   


지금의 오사카 평야는 본래 구다라노(〃野)였으며 히라노강(平野川역시 구다라강(〃川)이던 것을 일제 말기에 ‘구다라’라는 행정 지명들을 바꿔버렸습니다지금의 나라 땅 소가강(曾我川역시 고대엔 구다라강(〃川)이었습니다(‘일본서기’). 더구나 구다라스의 중심지인 지금의 오사카시 지역은 구다라군(〃郡)으로서지금부터 84년 전인 일제 하에도 이곳에는 남구다라촌(南百濟村)과 북구다라촌(北百濟村)의 행정구역이 존재했다고합니다지금도 많이 쓰이고있는 구다라나이’ 라는 말은 백제에서 온것이 아니다.’ 즉 보잘것없다’ 라는 얘기라고 합니다또한 이들보다 먼저 서기 3세기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을 야요이인(彌生人)’ 이라고합니다이들이 가면서 벼농사법을 전수했고(가도와키 데이지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의 체계일본역사’·1967, 오카자키 게이이치로 교수의 ‘일본미식사’, 1913) 또한 이들은 한국의 개도 데리고 갔다고합니다 (동물자원 육종학자인 다나베 유이치 아자부대학 수의학과 교수)


   b.  일본왕가
일본왕가에대한 역사가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일본왕은 일본인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이므로 민감한 사항이 될수 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i.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습니다우에다 교수는 그 책을 인용해 “30대 비다쓰 왕은 백제 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습니다‘일본서기’에도 “비다쓰왕은 구다라 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고합니다이것도 비다쓰왕이 백제 왕족이라는 것을 방증합니다더구나 비다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 629641 재위)은 나라 땅 “구다라강(百濟川옆에 구다라궁과 구다라데라를 지었고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는 ‘구다라대빈(百濟大殯)’으로 장례를 치렀다”(‘일본서기’라고 나옵니다‘구다라대빈’이란 백제 왕실의3년상 장례로서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년 재위)이 백제대빈 3년상 장례를 치른 것이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서 1971 7월에 출토된 묘지명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 사에키 아리키요 세이조대학 사학과 교수는 “조메이왕은 ‘구다라천황(百濟天皇)’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신찬성씨록연구’1970)라고 연구 발표했습니다.

II.        일본 고대 나라 지방의 아스카(飛鳥땅에서 백제 불교를 꽃피운 주인공은 백제 여성인 제33대 스이코 여왕(椎古 592628년 재위)입니다일본 ‘아스카 문화’라는 것은 스이코 여왕 시대의 백제 불교 문화를 일컫습니다. 18세 때 제30대 비다쓰왕과 결혼했는데 비다쓰왕은 다름 아닌 스이코 여왕의 한핏줄로서생모만 다른 친오빠였습니다일본 왕실사에서 근친혼은 어렵지 않게 볼수 있습니다.

 III.        794년 처음 왕도를 교토(헤이안경)에서 개창한 50대 간무왕도 어머니가 백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곳에는 현재도 고대 왕궁인 ‘교토어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IV.        조선왕조 말기의 영친왕비였던 이방자(나시모토 마사코 19011989) 여사가 생존 당시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 왕실에서도 숭늉을 마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한적이 있읍니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입니다”라고 만찬회 자리에서 발언했다고 일본의 한 학자(간다 히데카즈·오비린대학 교수)가 밝힌 일이 있습니다. 2001 1223일 아키히토 일왕은 도쿄의 왕실에서 68회 생일을 맞으면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처럼 말했다고합니다“나 자신으로 말하면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 역사책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아사히신문 2001 1223).

V.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2004년 충남 공주에서 거행되었습니다일본 왕실의 왕자인 아사카노 마사히코가 아키히토 일왕의 허락를 받고그해 여름(2004 83공주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송산리 제7호 고분)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습니다또한 공주시장에게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과 향로를 기증했습니다그가 기증한 향은 1300년 된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매우 귀중한 일본 왕실 제사용이라고합니다.

 VI.        오진 왕:. 이노우에 미쓰사다(19171983) 도쿄대 사학과 교수는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이 백제 왕족이며“천황씨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이주자였던 것”(‘일본국가의 기원’·1960)이라고 밝혔습니다미즈노 유(19182000) 와세다대 사학과 교수의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천황은 백제국 왕가로부터 건너와 정복 왕조를 이루었다”(‘일본 고대국가의 형성’·1978)라는 연구도 유명합니다닌토쿠 왕은 오진의 제4왕자입니다근년에는 일본 고대사학자인 이시와타리 신이치로(1926)의 저서 ‘백제에서 건너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이라는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오진 왕의 왕릉에 대해 “오진릉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에 건너온 백제의 곤지(昆支)왕자이다그는 5세기 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단정했습니다곤지 왕자는 개로왕의 제2왕자입니다(‘삼국사기’).


  c. 왕인박사
오진 왕 당시 왕인은 백제로부터 사언고시(四言古詩) 1000글자로 엮은 한자 학습서인 천자문을 가지고 왜의 백제인 왕실로 건너갔습니다일본의 만요가나(萬葉假名)는 우리나라의 이두와 같이 한자어를 소리()와 새김()으로 읽는 일본어 표현법입니다“만요가나는 이두의 영향을 받았다”(‘鄕歌及び吏讀の硏究’·1929)고 일제하 서울의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도쿄대 오구라 신페이(18821944) 교수가 지적했습니다실은 일본에서 이 만요가나를 가장 먼저 시작한 백제인은 왕인(5세기)이었습니다왕인 박사는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짓기도 했습니다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고대사학자 오노 스즈무교수는 “서문수(西文首왕인 박사), 왜한직(倭漢直아직기 왕자)의 후손인 백제인들이 ‘가나’를 만들었다또 한국 고대 향가(鄕歌)의 한자어 사용법은 일본 ‘만요시가’(萬葉詩歌)와 똑같다”(‘日本語の世界’ 1980)고 주장했습니다.  가쿠슈인대학은 옛 왕도였던 교토 땅에서 1847년 ‘공가(公家)학습소’라는 왕실학교로 설립되었습니다그 후 수도 이전으로 1877년에 도쿄로 옮겨 왕실인 궁내성에서 관장하는 ‘관립학교’로 이어지면서 대학으로 승격했습니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나서 만고불후의 인륜 도덕을 밝혀서 천하만세에 유림의 시조가 되고 박사 왕인은 공자가 돌아가신 후 760여 년만에 태어나 일본국 태자에게 충제도를 가르쳐 널리 나라 안에 전수해 1653년을 계승하여 왔다.” 이것은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왕인박사 비석의 내용입니다이 비문을 읽어보면 우리의 선현 왕인이 얼마나 일본 땅에서 숭앙을 받아 왔는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d. 행기스님
행기 스님 무덤에서 파낸 ‘사리병’의 ‘대승정사리병기’ 기록에 행기 스님의 생부는 “왕인 박사의 직계 후손”으로 나와 있습니다그뿐 아니라일본 고대의 대표적 불교 사서이며 역사의 명저로 평가되는 고승전(高僧傳)인 ‘원형석서’(元亨釋書 14세기)에도 백제 왕손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불교 전적으로 꼽히는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822년경 편찬)는 행기스님의 일화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일본영이기’는 야쿠시지(藥師寺)의 경계(景戒스님이 787년 집필한 고전입니다일본 왕실 최초의 대승정이 된 백제인 행기 스님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습니다그는 일본 각지에 49곳의 수도장과 사찰을 몸소 세웠고 특히 나라시에 있는 도다이지(동대사건조와 세계 제1의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 주조에 앞장 섯습니다일본 고대불교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행기 스님은 거리를 누비면서 적선을 하면서 행려병자들을 보듬어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베풀면서 불법으로 선도했습니다스님의 영향력은 8세기 일본 불교계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막강했고78세 때인 745년 쇼무 왕에 의해 일본 최초의 대승정으로 추대됐습니다쇼무 왕은 또한 749년 행기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승적에 들었으며 그 해 행기 스님은82세를 일기로 입적했습니다.

 

  e. 호류지(法隆寺법륭사)
나라 현 이카루가의 호류지는 요메이왕이 병석에서 있을때효성스러운 어린 쇼토쿠태자와 고모인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 여왕)가 불력으로 쾌유를 발원하여 서기 607년에 백제 건축가들을 동원해 세운 사찰입니다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호류지는 백제문화의 보고입니다.
첫번째가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입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서 일본인들이 나라 땅의 호류지를 찾아가는 것은 이 구다라관음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이 백제에서 건너간 구다라관음입니다. 원래 ‘허공장보살’ 로불리웠던 이 불상은 일본에 건너온후 구다라관음으로 불리게되었는데 이는 백제에서온 관음상이라는 의미로 불리게됬다고합니다 (교토대학 총장을 역임한 고고미술사학자인 하마다 고사쿠 교수, 역사지리학자였던 요시다 도고 박사의 대일본지명사서’, 1900). 이 구다라관음은 독도문제와 비슷하게 일본학자들이 꾸준히 일본제품 이라고 주장하고 있읍니다 그만큼 일본의 자랑이 백제로 부터 왔다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얘기겠죠. 그중에 하나가  녹나무 얘기입니다. 이 관음상은 녹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녹나무는 한반도에 자생하지 않는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일본 고문서학의 태두인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18391931) 교수가 쓴 일본 사학계의 명 논문인 ‘신도(神道)는 제천(祭天)의 고속(古俗)(1891 1012)에는 “신라로부터 삼나무, 전나무,녹나무, 피나무의 종자를 일본에 가져다가 심었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두번째는또 하나의 훌륭한 녹나무 구다라 불상 ‘구세관음(救世觀音)’입니다.

백제관음과 함께 구세관음이 쌍벽을 이루며 구다라 불교미술품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구세관음은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년 재위) 6세기 말경에 왜 왕실로 보내준 오늘의 일본 국보이자 비불입니다. 구세관음은 평소 공개하지 않고 1년에 두 번, 봄가을 단기간(41155, 1022일∼113)만 공개됩니다. 이 기간에는 일본 각지에서 백제관음과 구세관음을 동시에 보기 위해 찾는 인파로 붐빕니다. ‘쇼토쿠태자전력’과 ‘부상략기’에 보면 “백제 위덕왕이 성왕을 추모하여 구세관음상을 만들었으며, 백제가 왜 왕실에 보냈고, 법흥사 금당에 서기 593년에 안치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구세관음을 일본에보낸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술한 호류지 고문서 ‘성예초’에는 백제의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여 존상을 만들었다고 적혀있읍니다. 이또한 끊임없이 일본제품 이라는 논쟁이있읍니다.
 
세번째는 우리가 익히 들러왔던 담징의 금당벽화입니다.

호류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금당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금당 벽화가 있습니다. 금당벽화는 중국의 윈강 석불,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의3대 미술품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 벽화는 모두 4점으로 '석가정토도', '아미타정토도', '미륵정토도', 약사정토도'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19491월 내부 수리 공사중 화재가 나서 비천도 등의 그림들이 불에 그을려져 버렸습니다. 화가들이 깔고 앉았던 전기 담요에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탄 것은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는 일본 화가들이 복원한 그림들만 보입니다. 일본역사가, 미술가들은 이또한 담징이 그린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670년 화재로 불타서 재건됬다는겁니다. 담징은 631년 열반에 드셨읍니다. 도쿄대 건축학과 세키노 다다스 교수 등은‘고구려자’로 금당 등을 실측하여 금당은 603년 지어진 그대로라고 밝혔고 일본 정부 문부성 역사교과서(1924)에서도 담징의 금당 벽화를 인정했고더욱 뒷날인 일본어 사전 ‘고지엔’(1963)에서도 역시 ‘비재건설’을 뒷받침했습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담징은 또한 오경을 알았고채색및 종이와 먹을 잘 만들었다또한 맷돌을 만들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네번째는백제 왕실에서 보내준 높이 226.6cm, 정면 너비 114.5cm 크기의 옥충주자입니다. 스이코 여왕이 도유라궁에 안치하고 이 불단의 2층에 봉안한 불상을 향해 합장 예불하던 귀중한 구다라 불교 문화재입니다.

오늘의 일본 국보 문화재가 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옥충주자는 검게 옻칠을 했으며, 세계적인 칠공예 장식 미술품으로 찬양받아 오고 있습니다.
 ‘옥충’이란 무지갯빛으로 눈부신 날개를 자랑하는 곤충 ‘비단벌레’를 가리키는데 옥충주자는 중요한 부분마다 인동당초 문양으로 투시 조각한 금동 장식으로 만들어졌고 금동 금구 밑에는 2563장의 비단벌레의 화려한 날개들을 깔아서 정교하게 한 보기 드문 명품입니다왜 왕실로 옥충주자를 보내준 것은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인데 그 당시 처음에는 옥충주자를 가시키야 공주(뒷날의 스이코 여왕)의 모후인 기다시히메(조정의 최고 대신인 백제인 소아도목의 딸) 왕후에게 보냈던 것이라고 미국인 동양사학자 페놀로사(E F Fenollosa 18531908) 교수는 밣혔으며 다음과 같이 칭송했습니다.
 
“옥충주자와 이상하리만큼 키가 큰 목조관음상(백제관음)은 조선 미술의 위대한 보물이다. 서기 590년경에 백제에서 왕후에게 보내왔다”(‘동아미술사강’ 1912).
 
1885 5월부터 그 당시 일본 정부 궁내성의 나라지방 문화재 조사에 참여했던 도쿄미술학교 오카구라 덴신(18621913) 교수도 옥충주자가 백제에서 건너왔음을 밝혔을 뿐만아니라 이에관한 논문만 수십편에 이른다고합니다.
 
일본 민예학자로 저명했던 센슈대학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교수는 다음과같이 얘기했습니다.
 “일본 국보는 모두 조선의 국보다”(‘朝鮮とその藝術’ 1948).


   f. 도다이지 (東大寺, 동대사)
백제에서 건너간 로벵(양변)의 책임하에 건립된 「나라의 얼굴」 도다이지 역시 호류지와 더불어 세계 문화재로 등록된 사찰입니다이 사찰은 고대 백제인을 주축으로 신라인과 고구려인들이 뜻을 모아 남긴 결실인데 그 대표적인 세 분의 성인은 구다라인(백제인행기(668749) 큰스님과 양변(689773) 큰스님신라인 심상대덕(8세기큰스님입니다 (‘동대사요록’ 1106 도다이지 관정 스님 편찬). 이곳에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인 대불전이 있습니다가로 57m, 세로 50.48m에 높이48.74m로 현대 건물 16층 높이와 맞먹습니다쇼무 천황 때인 745년에 처음 지었을 때는 1.5배나 더 컸다고 합니다. 100m 높이의 7층 쌍탑도 있었답니다.


또한 도다이지에 안치된 비로자나불역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데 그 높이가 22m에 달합니다.


쇼무 천황 때인 749년에 완성된 이 불상은 주조에만 3년이나 소요되었는데 역시 백제 조불사들이 대거 투입되었습니다도다이지 ‘대불전’이라는 거대한 금당 안에 모셔 있는 높이 16m가 넘는 비로자나대불을 주조할 때 얼마나 많은 재료가 소요됐을까요?. 행기 스님이 몸소 써낸 ‘조사재목지식기’(752년 초경)를 참조하면대불전 건축과 대불 주조 등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연인원은 250만명으로 당시 일본 전체 인구(500만명)의 약 반수에 달한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특히 이 무렵 비로자나대불의 금동불상을 위해 황금 900량을 시주한 사람은 백제인 백제왕경복(698766) 태수였습니다(속일본기). 불상이 워낙 커서 그 얼굴 길이만 하더라도 약 5m,손바닥 길이는 310㎝인데 해마다 87일 거행되는 연중 행사가 장관이라고 합니다이른바 ‘어신닦기’라는 대청소 행사인데 약 250명의 승려가 이른 아침부터 대불전 천장에 둥근 볏짚 의자를 새끼줄로 줄줄이 매달고거기 걸터앉아 부처님 얼굴을 닦고 귀를 닦고 입술을 닦아낸다고합니다이때(87)는 여느 때보다도 관람객들이 붐빈는데 이 대청소를 지켜보면 얼마나 큰 부처님인가가 느낄수 있으니그 누구라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고합니다.
 
  g.  교류지 (廣隆寺광륭사)
교토의 명찰 고류지는 스이코여왕(592628) 시대의 재무장관 신라계 진하승(67C)이 서기 603 11월 몸소 세운 사찰입니다.  교류지에는 신라 적송으로 만들어진 일본 국보 제1호 ‘보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고역시 국보(지정번호는 없음)인 백제 녹나무로 만든 ‘보계(상투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어 매우 유명합니다보관 미륵불상은 서기 616년 신라 왕실이 왜나라 왕실로 보내준 불상(‘부상략기’)입니다또한 일본서기는 “스이코여왕 24(서기 616) 7월 신라에서 나말죽세사를 파견하여 불상을 가져다 바쳤다”라고 적고 있습니다이 신라 불상은 1951 69일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일본 국보 제1호로 지정됐습니다 (廣隆寺, 1970년 발행). 이는 우리나라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관반가사유상과 꼭 닮았습니다.
금동미륵보관반가사유상               보관미륵보관반가사유상

교류지에는 또한일본 국보 제1호가 된 신라 적송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함께 큰 상투가 특징인 일본 국보백제 녹나무 ‘보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류지를 세울때 진하승 장관은 백제 왕실에서 왜 왕실로 보내준 백제 미륵불상을 모셔 사찰을 세웠습니다그런데 이를 신라에서 보내주었다며 ‘신라 불상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규슈대 불교사학과 다무라 엔초 교수가 대표적인데 그는 “고류지의 두 국보 목조 미륵불상은 모두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오타 히로타로 교수와 마치다 고이치 교수도 신라에서 건너왔다고 했습니다다일찍이 저명한 불교미술 사학자 미나모토 도요무네 교수도 두 반가상에 관해 일제 말기에 쓴 저서에서 국적은 지정하지 않은 채“두 미륵상(보관반가상 및 보계반가상)은 스이코 시대(592628)에 조선에서 건너온 나무 조각상이다”(‘古美術見學’ 1944)라고 단정했습니다그러나 보계반가상은 백제의 녹나무로 만든 백제 제품이라는게 유력합니다.

 

h.  아스카 공원
아득한 옛날 약 2000년 전부터 큰 배를 만들어 타고 미개했던 선주민들의 왜땅으로 건너간 수많은 백제인신라인가야인고구려인들특히 구다라 사람들은 약1500년 전부터 현해탄을 건너가 본격적으로 왜섬의 규슈를 비롯하여 지금의 오사카땅인 ‘구다라스’를 정복했고그곳으로부터 다시 ‘구다라노’라는 황막한 들판을 계속 동진하여 ‘아스카’(飛鳥)라는 아늑한 분지에 새로운 왕도를 만들었습니다서기 588년 초에 백제로부터 불교사원 건축가들이 대거 아스카 땅 구다라인 왕실로 건너왔는데 이 당시 백제의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은 적극적으로 아스카 왕실의 불교 진흥에 박차를 가하며 백제인 소가노마코(蘇我馬) 대신을 힘껏 밀어주었습니다그리하여 나라땅에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비조사 혹은 법흥사가 세워졌고 아스카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대부분 건물은 소실되었지만 발굴조사에의해 사찰의 규모와 배치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아스카지역은 전지역이 유적지로 덮혀있지만 그중에서도 아름답고 화려한 벽화가 있는 다카마쓰즈카 지역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유적지입니다


호류지의 담징 금당벽화에 버금간다는 이 고분벽화는 칠색 비단옷을 입은 고구려 귀족 여인들의 자태가 흡사 금방 사뿐사뿐 걸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모습입니다주름치마두발등이 쌍영총의고구려 여인들과 흡사합니다벽화를 그린 화가는 고구려인 황문본실이라는 것이 일찌감치 규명됐었는데 일부 일본인 학자는 고구려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다카마쓰즈카의 안내 전단도 ‘아스카 시대 일본 국보’라고만 자랑할 뿐고구려 화가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삼족오 벽화도 고구려인이 그렸다는 설을 뒷받칩합니다.

 

i.  칠지도
현재 일본 나라현 텐리시의 이소노카미신궁(석상신궁칠지도는 한일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입니다이 칠지도로 인해 일본은 일본의 임나일본부’ 설을 주장할수 있기때문이죠
 


일본에서는 백제가 일본에 이 칼을 헌상했다는것이고 우리나라는 백제가 일본에 하사했다는주장입니다칠지도의 길이는 75cm 이며 도신의 양쪽에는 3개의 사슴뿔과 같은 가지가 달려있습니다중요한 것은 그 도신 의 양면에 61자의 명문이 금으로 상감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이명문은 광개토대왕 비문과 같이 몇글자가 훼손되어 명확하게 해석이 되지않고있읍니다아주 중요한부분만 골라 누군가가 일부러(?) 지운듯한… 맨 마지막 문장이 傳示後世 (잘 전해서 보존하라인데 고대국가에서 보통 칼은 왕이 아랫사람이나 장군들에게  ‘짤싸워라’ 라는의미로  하사를 하는것이죠그런데 칼을 헌상하면서 후세에 잘 전해서 보존하라라는 말을 쓸수 있을까요또한 당시에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인데 삼한을 정벌하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까지 죽인 백제가 일본의 침략을받아 칠지도를 헌상했다는것은 이런 주장을 한사람들은 이당시의 한반도의 역사에 무지했거나 억지 주장을 하고있다는 얘기가 됩니다여기에 칠지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얘기가 있읍니다
http://www.kbs.co.kr/1tv/sisa/hdhistory/vod/vod/1360542_13796.html,
http://www.youtube.com/watch?v=V6p4CoWVZQk


j.  기요미즈테라
이곳은 고대 일본 정복왕인 백제인 오진왕(45세기 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8세기 말 세워진 것으로798년 이 사찰을 창건한 이는 백제인 가문의 무장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758811)입니다다무라마로의 조상은 오진왕 때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 왕족 아치노오미였습니다 다무라마로는 백제계 간무왕(770806 재위)의 총애를 받던 왕실 최고 무장인 정이대장군이었는데 778년 부인이 임신 중이라 보약이 되는 사슴을 잡으러 음우산에 갔다가 수행 중이던 스님 엔친(?-821)을 만나게 됩니다엔친 스님은 이곳에 관음사를 세웁니다다무라마로가 청수사에 금색 40수의 관세음보살상 1채를 만들어 받쳤고그가 살던 집 5 3면짜리를 기증해서 당사(堂舍)로 했다고 일본 역사책 부상략기는 적고 있습니다. 

 

k. 센소지
본당 ‘관음당’ 안에 모셨다는 불상은 백제 ‘관음상’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그러나 아직 누구도 이 관음상을 본 일이 없다는 ‘비불’로 유명합니다비불이란 왕명 등에 의해서 공개를 금지시킨 귀중하기 그지없다는 비공개 불상인데 이 관음상은 크기가 사람 손 안에 드는 불과 18푼 길이의 작은 부처상이라고 합니다이 사찰의 ‘본존연기’에는 불상을 모신 인물이 7세기 백제인 “히노쿠마노 하마나리와 히노쿠마노 다케나리 형제”라고 적혀 있습니다센소지 왼쪽에 센소지와 비슷한 신사가있는데 사실 이 관음상이 모셔져있는 ’ 이 센소지이고 두 어부를 모신 신당이 아사쿠사 신사입니다이 아사쿠사신사의 제사 축제인 ‘산자마쓰리’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3대 마쓰리’의 하나로 꼽혀 옵니다.

 

l. 도자
일본 도자기의 주요 생산지는 대부분 산재하고 있습니다일본도예의 3대 거봉이라고 일컷는 사스마야키가라스야키아리다야키 등은 대부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끌려온 우리 선조 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정유재란때 전라도 남원 전투에서 패한 후 약 70여명의 도공이 3척의 배에 실려 끌려갔는데 그 가운데 박의평심당길 등 43명이 탄 배가 규수 가고시마의 시마비라 해변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5년간 살다가 1603 12월 현재의 나에시로가와의 미야마 마을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것이 가고시마 사쓰마야키입니다현재 미야마는 200호의 세대중 100호 정도가 도공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심당길의 후손으로 400여 년간 14대째 유업을 이어온 심수관가가 유명합니다.
 
두 번째는임진왜란때 끌려간 도공과 일찍 왜구 일당인 마쓰우라 도당들에게 잡혀갔거나 그들의 유혹에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카현 가라스야키입니다.이들은 현재 대부분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이며이중 나가사토다로 우에몬은 일본을 대표하는 도예가이며 그의 부친은 국보로 추앙받기도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대중 사기그릇 도자기가 주종인 사카현의 아리다 야키입니다정유재란때 공주에서 끌려와 사카현 아리타지방에서 문을 연 이참평이 시조입니다그는 오랜 고행 끝에 1616년 석영분이 많은 도석을 발견하여 일본 백자 아리다 야키의 도조(陶祖)로 숭상받았습니다지금도 아리다시는 매년 4.29 - 5.6일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리다축제”를 개최하고 있읍니다그리고 아리다에는 현재 700여개의 도자기 상점이 줄지어 있고 이참평 13대 손도 도공으로 일하고 있으나 미미한 존재이다.
 
그밖에도 1604년 한국 도공 이작광이경 형제가 야마구치현의 마스모토야키에서 시작한 하기야키조선도공 팔산에 의해 시작된 후꾸오카의 다가도리야키조선도공 존해에 의해 시작된 구마모토현 아가노야키조선인 웅천 출신 거간에 의해 시작한 백자세공이 특징인 나가사끼현의 미가와우치야키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우리 선조들이 전래한 것입니다따라서 일본 도자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m. 그밖에
시텐노지정창원 (일본왕실의 보물창고, 특별전 형식으로만 공개)성왕 신사행기대교도톤보리고라이바시젠코지(나가노), 코무덤하코네증상사 (고려 대장경등 우리나라와 관련된곳은 너무도 많습니다.너무도 많아 방문할곳을 선택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2차대전때 일본이 일본 최대의 전함에 야마토(나라지역 옛 지명)란 이름을두번째함에  무사시(토쿄지역 옛 지명)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뭘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9. 일본속의 한국 문화재


a.  일본의 문화재 약탈
문화재청이 발표한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 10 7857점입니다그중에 60%가 넘는 61409점이 일본에 있습니다. 1964년 문화재 환수를 추진했을때의 4천 여점에 비하면 엄청나게 증가한 숫자입니다하지만 이 숫자는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숫자일뿐 실제로 일본에 있는 문화재는 이보다 훨씬 많을것입니다일제는 우선 당시 조선의 상징적인 문화재를 의도적으로 훼손했습니다잘 알고 계시는 창경궁은 순종이 창경궁에서 기거하자 일본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 등을 조성하였습니다이름도 임금이 사는 '()'을 놀이 동산 개념인 '()'으로 격하시켰습니다그것보다도 더큰 문제는 80년대 까지도 여전히 동물원이 있었고 여전히 창경원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 공간이었던 자선당 건물을 통째로 뜯어 일본으로 무단 반출하였고 이후 오구라에 의해 미술관으로 활용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건물은 불타고 주춧돌만 남게되었는데  주춧돌에 대한 반환 노력이 시작되었고 결국 약탈 당한 지 80년 만인 1995 12자선당의 주춧돌을 돌려받게 됩니다건물을 통채로 가져가서 주춧돌만

1918년 도쿄의 오쿠라저택에 옮겨 세워진 경복궁 자선당 모습


또다른 대표적인 예는 국보 1호 숭레문입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숭례문 주변 성곽을 헐어버리고 도로를 냈습니다이때 이완용이 도로를 닦을 비용마련을 위해 성곽을 헐어서 매각하자는 건의를 이또오에게 합니다무례함과 몰지각함의 극치이죠이어 1915년엔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서문), 혜화문(동소문)도 헐어버렸습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이 보존된것은 순전히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해서 남겨둔거라고합니다일본의 유적지인셈이죠.


문화재 약탈은 소위 수퍼 왜구 3총사라 불리우는 이토 히로부미가루베 지온오구라 다케노스케 를 비롯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앞다퉈 일본으로 반출해갔습니다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을 등에없고 하수인 니타를 시켜서 있는대로 고려자기를 싹쓸이 했습니다이토의 수집열이 최고조에 이르던때(1913~14) 도굴업에 종사하는사람들이 수천에 이르고일 왕가와 귀족 들 사이에서 고려자기는 최고급  선물로 통했습니다.이토가 수집한 완품의 고려자기가 1000점에 이른다고 합니다이토가 당시 일왕에게 상납한 최고급 도자 103점은 도쿄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또한 창경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세우면서 고려자기 6,562 점을 전시하는데 도굴품을 합법화하는 소위 장물세탁’ 을 했습니다물론 여기에 들어가는 돈을 모두 조선 왕실이 부담했습니다.


이토가 훔져 갔다 1964년 반환된 보물452호 청자귀형수주


가루베 지온은1927년에서 40년까지 공주고보에서 일본어 담당 교사로 일하면서 무려 1천기에 달하는 백제 고분을 제 멋대로 도굴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한마디로 고고학을 가장한 도굴업자요,역사학자를 가장한 침탈자였습니다자신이 가르치는 조선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공주와 부여에 위치한 백제 고분들을 무단으로 도굴한 후그 부장품들을 깡그리 일본으로 밀반출했는데 다행히도 무령왕릉은 그의 손을 피했습니다가루베가 눈에 쌍불을 켜고 찾아 헤맸던 무령왕릉은 그가 도굴한 송산리 6호분에서 불과 10m도 안 된 지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그가 발굴한 송산리 6호분은1933 7 29일부터 시작되어 8 2일까지 발굴했다고 총독부에 보고했는데 8월 상순에 후지타등 3명의 학자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흔적 없이 깨끗이 청소 되어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후 패전에 따라 정부는 일본정부에 반환요구서를 보냈으나 묵살되었고 유족은 2006 11월에 겨우 4점의 유물만을 공주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으로 송산리 6호 고분 유적 도굴 사건은 끝을 맺었습니다.



송산리6호 벽화 – 사신도 중 백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전기와 조선합동 전기금융 기관 등 근대적 기업을 운영하며 축적한 막대한 부와 총독부산하의 수백명의 도굴꾼들을 이용하여 영남,가야 지역 고분을 주로 약탈하였으며 광복이후 그 약탈품들을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렸고 재정난 때문에 도쿄 박물관에 기증한것이 현재 오구라 컬렉션으로 불리고 있습니다현재 오구라가 일본으로 밀반출한 한국 문화재는 밝혀진것만 1144점으로 도쿄 국립박물관에 오쿠라 목록의 정확한 숫자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밖에도 조선의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동양 3국의 고문헌 18,000여 점을 끌어모아 고향인 야마구치에 가져갔습니다그가 죽자 그의 아들이 그 장서를 모아1922년 고향인 야마구치시에 데라우치문고를 설립하게 되는데1957년에 데라우치문고는 야마구치 현립 여자단기대학에 기증했다가 현재는 야마구치 현립대학 부속도서관 소속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요즘 관심 대상이 된 북관대첩비가 약탈당한 것은 1905년 러일전쟁 때 입니다이 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장 정문부(15651624)가 왜군을 물리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야스쿠니신사의 외진 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2005년 반환되어 2006년 북한으로 인도 되었습니다.일본 정부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가 무력을 동원해 19071909년경 경기 개풍군(현재 북한의 개성시부소산에 있던것을 마구 해체해 도쿄로 빼돌렸던 경천사지 10층석탑(고려 1348년 제작국보 86)에도 불행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서 이 탑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서 여론에 밀린 다나카는 결국 1918년 이 탑을 한국에 반환했지만 이미 이 탑은 적잖이 훼손된 뒤였습니다. 
또한 이 무렵 일본인들은 불국사 다보탑 기단부의 네 귀퉁이에 있던 4개의 돌사자 중 3개를 몰래 떼어내 달아나기도 했고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124)1912년 일본인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습니다이 보살상이 돌아온 것은 1966한일협정에 따른 약탈 문화재 반환 협약에 의해서였습니다. 
무조건 파괴해버린경우도 있습니다전남 해남의 이순신 명량대첩비충남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전북 남원의 이성계 황산대첩비경기 고양의 행주전승비 등 20여 점의 석비가 그렇게 사라져갔습니다. 

물론 일제시대 때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적지 않았습니다간송 전형필수정 박병래 선생 등은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무단반출을 막았고 일제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강탈해가자 당시 언론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폭로해 1918년 결국 ‘환수 항복’을 받아낸 영국인 베델과 미국인 헐버트의 헌신적인 노력도 있었습니다.


b.  일본의 박물관들

                                i.    도쿄국립박물관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있는 토쿄 국립 박물관은 일복 국보 87점과 557점의 중요 문화재를 소장하고있습니다오구라 콜렉션으로 불리우는 한국의 유물은 동양관(공사중, 2013년 개관현재는 효경관에서 전시)에 소장하고 있는데 다뉴세문경단용문환두대도금고동종청동호청동전병금동관초두여래입상관음보살입상이도다완,청자투조단초문상국화문 나전경상고려청자조선 백자들장신구 무기등 이루 헤아릴수 없을정도로 많습니다문화재청 조사로는 6751 점이라고 하는데 조사에서 빠진것미확인비공개등을 합하면 이보다 훨신 많을것입니다도쿄국립박물관은 또한 호류지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호류지보물관도 있습니다.

 


 ii.    오구라 컬렉션오구라 슈우코칸
오구라컬렉션은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에 한국중국일본의 1,100 여점의 유물을 말하는데 말하는데 대부분이 한국유물이고 중국일본 유물들이 소량 포함되어 있습니다이 컬렉션은 일제강점기에 오구라가 1922년부터 1952년 기간 중에 국내에서 수집해 가서 ‘재단법인 오구라컬렉션 보존회’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 그의 아들 야스유키에 의해 1980년대 초반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1,000여점에 달하는 한국 유물들은 고고회화조각공예전적복식 등 다양한 분야전 시기의 유물을 망라하고 있고 이중에는 일본의 중요문화재 8중요미술품 31 31점이 일본의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이 오구라 컬렉션외 드러난 오구라의 유물은 1940년대 해방되면서 경주박물관에 1차로 접수된450여점경북대 박물관에 37(보물 3), 대구방첩대에서 전기공사 중 발견된 유물 600여점이 넘습니다오구라 컬렉션과 합하면 2,200 점이 넘습니다이것은 단지 드러난 숫자일 뿐이고 일본에 건너간 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 처분한 물건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합쳐 약 4000여점의 문화재들이 오구라에 의해 전국의 고분군을 파헤치며 광적으로 모아진 것들입니다오구라는 양산의 부부총에서 트럭한대분의 황금유물과 구슬을 도굴했다고 하는데 해방후 다시 한국의 학자들이 부부총을 재조사했지만 금귀걸이 한짝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현재도쿄의 호텔 오구라 슈우코칸 뒷 정원에는 11세기의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5층 석탑(경기도 이천군 정토사지) 14세기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팔각 5층 석탑(평안남도 대동군 율리사지)등을 옮겨놨습니다이천 오층 석탑은 지금 한참 반환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iii.    고려미술관
한국의 간송 전형필이 세운 간송 미술관과 비슷하게 있다면 일본에도 재일 조선인 정조문이 세운 고려미술관이 있습니다. 두 분 다 일제 강점기에 흩어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열심히 문화재들을 사들여 후대에 보여주기 위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한자리에 모은 선각자들입니다재일 조선인 정조문 선생님의 불우한 환경고난 극복의 일생민족과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늘 고려미술관을 만든 원동력이 됐습니다정조문 선생님이 수집한 서화가구도자기석물 등이 1700점이 넘었습니다.
그중에는 국내에서 볼 수 없는 문화재급 고미술품들이 많이 있는데14세기 청자 상감운학문완이나 17세기 철사 용문호같은 명품을 비롯하여 천문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조선 선조2(1569)년의 작품인 치성광불여래제성왕림도는 백미로 꼽힙니다.



천문도의 하나인치성광불여래제성왕림도

그밖에 색난이 1689년에 제작한 목조삼존불감과  소를 찾아 떠나는 동자의 모험과 수도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린 심우도는 귀중한 불교 미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고 에도시대 중기 조선통신사 행렬회권을 비롯한 마상재도등 관련 고미술품 40점은 역사적으로 미술적으로 아주 귀중한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십장생병풍과 평양성 병풍을 비롯하여 조선 말 권돈인과 완당 김정희가 함께 그려서 3단 족자를 꾸민 뒤 추사가 ‘땀을 흘리면서 썼다’고  적은 ‘시문산수도역시 명품이고 평소 정조문선생이 좋아했다던 국보급 조선 청화백자와 고려청자를 비롯 상감분청귀알분청 등이 있는가 하면한국의 민화전에 빠짐없이 초대되는 문방사우와 호랑이가 등장하는 민화들이 고려박물관의 자리하고 있습니다.


 iv.    네즈미술관

네즈 가이치로우는 석유·제분·맥주 등의 사장이었고 중의원 의원이기도 했습니다그가 1940년 죽자 후손들이 그 자택을 네즈 미술관으로 만들었습니다이곳에는 사리탑 뿐 아니라 5중탑부도 그리고 국보급 불화 아미타여래도고려 다완조선 청자 등도 소장되어 있습니다고려·조선조의 것을 집중적으로 모았던 ‘아키야마 콜렉션도 이 미술관에 넘겨져 있습니다소장품은 모두 7천 점에 육박하고 있는데이것들은 동양 여러나라와 조선에서 약출하거나 사들인 것이라 합니다.

아미타 여래도


v.    동양도자기미술관아타카컬렉션

동양도자미술관은 오사카 시가 세운 도자 전문 미술관입니다아타카 에이이찌는 메이지다이쇼우때부터 미적정신적 기준을 설정하여 주로 한국도자기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는데 1000점 정도의 작품중에 800점 정도가 한국 도자기라고합니다.1975년 경영위기에 빠지자 컬렉션의 일부를 매각하였고, 1980 3월 채권단은 아타카컬렉션을 수장전시할 미술관을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오사카 시에 기증하였고, 1982 11월 미술관이 완성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이들은 기형과 기법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최상의 질로 평가되는 우수한 작품들이며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것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재일동포 이병창 씨는 1999년 자기의 수집품 모두를 이 미술관에 기증하여 동양도자미술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유수의 한국 도자 전문 미술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힌 것으로 보입니다.

청자상감보상화동자문 주자.

상감은 세계 어느곳에서도 없는 우리 고려시대 기법입니다.


                                vi.    일본민예관

오오하라의 후원으로 이 민예관을 설립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그 예술≫을 비롯한 많은 한국미술에 관한 글들을 발표한 민예운동의 창안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그는 조선백자를 가장 사랑했다고합니다사실 민예’ ‘민화라는 말은 그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들입니다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하려할때 반대하며 쓴글도 가슴에 남습니다그가 비록 한국의 미는 비애의 미’ 다 라고 시민사관을 지지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총 수장품은 약 1만여 점 정도 중에 한국유물이 약 1,500점 정도이며한국의 공예품만을 상설 전시하는 특별 전시실을 마련하고 있을 만큼민예관에서 차지하는 한국미술품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00여 점의 한국문화재는 회화류가 210여 점도자기류가 650여 점공예품이 510여 점이며 기타가 100여 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강세황김수철이암 등과 같은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들의 회화류도 포함되어 있고 도자기류는 고려도자(90여 점)를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후기의 것들이 대부분인데, 15세기 후반의 분청사기, 18세기의 청백색 백자항아리와 제기(祭器)그리고 다양한 기형과 용도의 18세기 청화백자 등 조선시대 도자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청화모깎기초화문표주박형병


                                vii.    네이라쿠미술관

일본 나라현의 나라국립박물관에 인접해있는 네이라쿠 미술관은 1940년 나카무라준사쿠에 의해 설립되었으며현재는 그의 손자인 나카무라준스케씨가 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술관의 중국미술품은 은대에서 한대에 이르는 기간의 고대 청도기류 200여 점을 포함하여 2,000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우리 나라 미술품은 고려도자를 중심으로 300여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이들 고려도자들은 기종면에서 일목요연한 수집체계가 돋보이지는 않지만 기종이 다양하고 몇몇은 국내에서도 보기가 쉽지않은 명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나카무라준사쿠 씨가 자국민에게 이웃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싶었다는 수집 동기에 상당히 부응하고 있는 듯관람객이 적지 않으며전시기획도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미술관이라고 합니다.




                         viii.    야마토문화관   

고려불화는 학국 불교미술의 백미이지만 세계적으로 160여점 정도밖에 남아있지않습니다기이하게 그중 한국에는 10여점밖에 없고 대부분은 일본에 있습니다일본에 많이 있는 이유는 그많큼 일본사람들의 평이 좋다는 얘기겠죠야마토문화관은 도자기류회화류특히 고려불화를 세 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유수의 사립미술관인데특히 한국미술 관련 전시회가 자주 열리는 곳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습니다한국 불교미술사의 일대 사건이었던 1976년 고려불화’ 라는 주제의 국내외 최초의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고그 이후로도 근년의 이조회화특별전(1996 8)에 이르기까지 회화조각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수십 차례의 한국미술관련 전시회를 열어 왔습니다.

용모양 정병 – 야마토 문화관


이밖에도 가가미신사에 보관되어있는 교려불화의 극치인 수월관음도이 수월관음도가 최초로 샌프란시스코에 전시되었을때 뉴욕타임스는 모나리자에 버금간다고 극찬했습니다세세히 들여다보면 디테일한 묘사가 입을 벌어지게합니다이마의 점을 확대해보면 그안에 0.2mm 의 나선들이 그려져있습니다.


또 센소지가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또다른 수월관음도 (물방울관음도). 혹자들은 이 관음도가 가가미신사의 수월관음도보다 훨씬 튀어나 작품이라고 애기들 합니다. 그동안 공개를 꺼리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의 존재 여부만이라도 확인시켜 달라는 요청에 간신히 응했는데 이 불화를 꺼내 왔을 때 관장과 학예원이 작품에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마음을 바꾸어서 2010 공개한것이라고합니다.


또 잘 아시다시피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학에 있습니다. 제작연도(1447)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산수화로 신숙주 김종서 박팽년 등 당대 최고 문인들 시문과 글씨가 있는 국보급 문화재이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판본인 고려대장경 재조대장경587상자 4995첩은 오타니대학에 보관돼 있습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찍어낸 것입니다. 일본에있는 우리의 문화재는 적어도 적어도 끝이 없습니다.

 

해방직후 민간의 학술문화단체가 연합하여, 피탈된 문화재의 반환을 미극동군사령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요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일본 정부에 의해 그것은 무시되었습니다. 
Time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일본의 점령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1948년에 있었던 라디오 연설 녹취록을 발견하였는데, 녹취록에는

군사행동과 점령에 의해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소수 의견일지라도 아주 강력히 반대한다. 
조선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문제는 미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일본을 이념적 압력에 취약하게 만들며, 전복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할 우려가 있다.”

하고 적고 있습니다. 미군정 당국이 약탈자를 비호하며 우리가 약탈 문화재를 반환받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슬픈현실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를 싫어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구요. 
1965년 정부는 일본정부에 문화재 반환요청을 시도합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본이 소유하고 있는 조선 문화재는 모두 정당한 수단에 의한입수물이므로 반환할 의무가 없다고 하면서, 다만 이러저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일부 문화재를증여한다는 극히 일본적인 입장을 취했고 1990년대 데라우치 문서 반환 때도 이런 괴변을 늘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한일 양국은 1400 점의 약탈문화재 반환에 합의했지만 경제지원 대가로 서둘러 협상을 마무리해버렸고, 추가로 확인되는 약탈문화재에 대해서도 일본국민 , 민간인이 소유한 약탈문화재는 일본 정부가 기증을 권고할 있다는 합의의사록만 별도로 작성해버렸습니다.

물론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가 무조건 국내로 환수되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아주 민감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 또는 사원 등에서 잠들고 있어 현지에서 한국 미술문화의 연구 및 이해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리고 원산지에 있어야 그 가치가 올바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귀환 또는 환수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환되지 않을 우리의 문화재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것이 라는걸 모르고 구경하는것보다는 우리것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대한다면 솟아오르는 감동이 남다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한 자료들

1.    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역사의아침, 2009.

2.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역사>, 동아일보사, 2005.

3.    우실하, <동북공정너머 요하문명론>, 소나무, 2009

4.    김달수, <일본 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 대원사, 1997.

5.    홍윤기, <행기 큰 스님>, 자유문학사, 1996.

6.    홍윤기, <일본 속의 백제 구다>, 한누리미디어, 2008.

7.    이윤옥, 김영조,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기>, 바보새, 2011.

8.    박천수, <일본 속의 고대 한국 문>, 박천, ()진인진, 2011.

9.    황수영,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한국미술사학회, 1973.

10. 이구열, <한국 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1996.

11. 이순자, <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경인문화사, 2009.

12. 한영대, <조선미의 탐구자를>, 학고재, 1997.

13. 그밖에 수없이 많은 블로그들.

 

그동안 보잘것없는 여행기를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행기를 막상 시작했지만 사실 이 긴 여행기는 마모 여러분들의 격려와 응원으로 끝맺은 산물입니다.


마지막으로 독도 플래시맙.
http://www.youtube.com/watch?v=NA4ASbDglbU


http://www.youtube.com/watch?v=eHd5F6b72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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