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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김치 이야기

달라스초이, 2022-11-09 21: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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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메님이 올리신 김장 글을 보고 옛 김장관련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

 

코끝이 쨍~하게 얼어붙는 초겨울 어느날이면

여지없이 김장배추를 실은 트럭이 집앞에 도착했다.

엄마는 며칠전부터 배추와 무를 보러 다니셨고,

가격흥정에 성공한 배추와 무가 집에 당도한 것이다.

 

배달꾼 두 명은 두 포기씩 연탄던지듯

한 명은 트럭위에서 또 한 명은 트럭 밑에서

배추를 마당 한 켠에 쌓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해엔 120포기, 어느해엔 100포기... 무도 100여개...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김치 수량이지만

할아버지부터 나까지 8식구의 겨울식량으로는 이것만한게

없었기에 엄마는 그 큰일을 혼자 척척해내셨다.

 

김치속을 만들기 위해 한달 전부터 마당엔 붉은 고추가 널려져 있었고,

잘 마른 고추를  광목천으로 쓱쓱 문질러 닦고는 목장갑을 끼고

고추의 꼭지부분을 따내려 갔다.

그때쯤이면 매운 고추 향내에 재채기가 연신 일어났지만,

엄마는 고추가 좋아서 그런것이라며 일견 미소를 띄기도 하셨다.

 

꼭지 따진 고추는 커다란 포대자루에 담아 방아간으로 고추를 빻으러 갔다.

커다란 벨트가 윙윙~ 소리를 내며 두세차례 방아기계에 고추를

넣었다 빼면 선홍빛 고추가루가 작은 포대에 담겼다.

 

배추를 손질해 검은 칼로 반을 쩍~하고 쪼개면

노란빛과 연두빛의 오묘한 속살이 드러났고,

엄마는 배추가 좋다고 말씀하시며 익숙하게 소금물 함지박에

배추를 절여가셨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김장은 저녁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끝이났다.

그 많은 김치를 하루만에 어떻게 담궜는지는 지금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김치가 담궈진 저녁이면 푸짐한 김장김치가 저녁상에 올랐다.

안익어 서걱서걱한 김치를 방금한 흰밥에 올려 한 술 넣으면

흰 빛과 붉은 빛의 향연이 입안에 펼쳐졌다.

 

다음날은 마당 한 구석에 땅을 파고는 커다란 김장독을 묻었다.

땅은 겉만 얼었다 뿐이지, 조금만 파내려 가면

금방 고운 항토흙이 나타났다.

항아리 주변엔 짚을 넣어 완충작용을 하고는 보온과 추위,

땅속과 항아리의 호흡속에 김장김치는

살얼음과 숙성의 경계선 위에서 익어갔다.

 

아내도 김치를 담근다.

마트에서 사온 배추와 고추가루로 김치를 담궈, 

플라스틱 통에 넣고는 김치냉장고에 보관한다.

복잡다단한 이민생활에 김치를 담궈 먹는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한다.

 

오늘 아침 뒷마당을 돌아보며 

김장독을 묻고도 남을 넉넉한 땅이 있건만

정작 김장독을 묻을 땅은 없다.

 

다만, 아스라히 피어오르는 김장의 아날로그 추억이

내 감성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저 고맙고,

그 감성을 전해준 엄마에게 눈물겹도록 감사할 따름이다.

17 댓글

눈빛

2022-11-09 22:14:02

예전 어머니께서 김장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 역시 말린 고추를 동생과 함께 동네 방앗간으로 들고 간 기억도 새록새록 납니다. 이젠 아내의 나이가 그 때 어머니의 연세보다 적지 않음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질 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달라스초이

2022-11-10 00:40:12

방아간에서 가래떡이 떡틀에서 나오면 방아간 아저씨가 조금 떼어 나눠주셨었죠. 방금 나온 가래떡의 그 따뜻함와 몽실몽실함...ㅎㅎ

tealatte

2022-11-09 22:46:13

달라스초이님 수필집 하나 내셔야겠어요. 글 정말 잘 쓰시네요.

읽으면서 저도 어릴때 생각이 좀 나네요. 어릴때 배추가 너무 흔해서 학교에서 배추를 학생들한테 팔던 시기도 있었고, 배추가 금추라고 양배추로 김치를 만들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말이죠.

달라스초이

2022-11-10 00:34:15

ㅎㅎ 과찬의 말씀입니다. 맞아요. 배추 풍년엔 학생집에 배추를 팔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양배추 김치도 만들어 먹었구요. ^^

오하이오

2022-11-10 00:09:23

비슷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제 기억은 '김장하는 날' '김장을 했다'로만 끝나고 마네요. 고추를 손질하고 빻고 배추를 가르고 절이는 모습은 말씀을 들으니 그랬던 것도 같다 싶습니다. 혹시 직접 김장을 하신건 아닌가 싶을 만큼의 섬세함에 감탄이 나옵니다.

미국에 와선 김치를 사먹으려 해도 차로 30여분 가야하니 오가면 1시간이 걸리고, 상표도 매번 바뀌고 같은 상표라고 해도 맛이 매번 달라지는 김치에 제 입맛을 맞춰야 하는 현실이 답답한 저로서는 담근 김치를 드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말에 샘이 나기도 하네요. ^^ 잘 봤습니다. 

달라스초이

2022-11-10 00:31:31

제가 대가족의 막내라 엄마를 이것저것 돕다보니 기억이 더 생생한듯 합니다. 어릴땐 이런걸 나를 왜 시키나 싶기도 했지만, 나이들어 보니 엄마와의 추억이 내 감수성을 키운듯 싶습니다.

용이아빠

2022-11-10 00:48:24

저도 오랫만에 옛날 김장하던 생각이 나네요.  김장 후 먹는 생김치 참 좋았했는데 말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달라스초이

2022-11-11 23:37:27

ㅎㅎ 추억을 떠올리셨다니 감사합니다. 김장후 먹는 김치 맛있죠.

포틀

2022-11-10 08:21:28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져서 그런지 '코끝이 쨍~' 읽는 순간부터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몰입하며 읽었어요. 갓 지은 밥에 올려 먹는 김장 김치 맛이 떠오르네요. 별 것 아니여도 너무 맛있었어요:)

달라스초이

2022-11-11 23:36:38

몰입해 읽으셨다니, 감사해요. 저도 어릴적 먹었던 따뜻한 밥에 김장김치가 그립네요.

belle

2022-11-10 21:54:40

좋은 고추 구해다가 고추 직접 말리고 닦고를 몇차례 반복하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죠.

오죽하면 요새는 아는 사람 없으면 좋은 고춧가루 구하기 힘들다고,

고춧가루 카르텔이라는 말까지 나오겠어요.

달라스초이

2022-11-11 23:35:52

맞아요. 김치는 고추가루의 품질이 김치의 맛을 좌우하죠.

다찌

2022-11-12 19:20:14

저희는 부부만 사는 2인 가구지만 김치소비가 많아서 보통 1-2달에한번씩 김치를 담굽니다. 와이프님이 오전에 배추를 소금물에 담가 놓고 오후 늦게부터 같이 김치를 만드는데, 보통 배추한박스, 무우 10여개, 파 여러단, 총각김치 몇단. 이렇게 하면 저녁 늦게 겨우 끝나구요. 깍두기, 배추김치, 파 김치등 큰통으로 몇박스 한켠에 쌓여 있는거 보면 뿌듯합니다. 

새로 만든 김치에 삼겹살 삶아서 소주 한두병 같이 마시죠. 

결혼전엔 김장해도 손도 까딱 않던 제가, 지금은 와이프 지시에 따라 김치 담그는걸 저희 어머니가 보시면 엄청 서운해실것 같아요 ㅎㄹ

달라스초이

2022-11-12 23:57:55

ㅎㅎ 그럴리가요? 어머님께서 며느리 도와 김치 담그시는 다찌님 보시며 흐뭇해 하실겁니다. 그나저나 바쁜 미국생활에 다양한 김치를 담궈 드시네요. 전 오이소박이를 좋아하는데.. P2는 그걸 잘 안만들어요. 제가 만들 솜씨는 되지 못하구요. ^^

Ulalarius

2022-12-09 20:42:28

명필이십니다. 읽으면서 상상으로 장면장면이 막 그려지네요. 너무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moondiva

2022-12-10 05:23:39

저도 읽으면서 눈물이 핑..... 제가 아이낳고 키우면서 깨달게 된거요... 엄마의 노고...

결혼한지 이십년된 지금도 가사일로 힘들때마다 엄마생각이 많이 나고 자주 얘기해요. 

엄마는 이 힘든 걸 어떻게 그렇게 다 했냐고... 김치도 종류별로 항상 밥상에...

그땐 그게 이렇게 고마운 일인지도, 그리워할 일인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두려워요.... 엄마목소리, 모습 더이상 볼 수 없는 날이 점점 다가온다는게...

내년에 뵐때까지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려요. 나 열무김치 담는거 가르쳐달라고.

 

한편의 잔잔한 수필,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 가요.

 

프리

2022-12-10 07:33:45

진짜 글모음집 하나 내셔야 할 듯요. 

초이님 글 읽으면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져요. 제 입가에 웃음이 생기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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