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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여행기]
2월의 한국

fenway | 2015.12.16 18:39:37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처갓집


하네다에서 김포로 들어 온 첫날 밤, 흔한 서울 도심 풍경이지만, 한밤중에 화장실 가다 거실에서 내다 본 창 밖에는 낯익은 따분함과 속된 일상의 풍경이 만들어 낸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샐 수 없는 모텔 네온 간판과 이에 대항하듯 들어 선 그만큼의 빨간 십자가를 보며 반가운 웃음이 나는 걸 보니 내 안 어딘가에서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십몇 년만의 방문이라 감회가 더 깊었던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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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어르신들의 권유는 오래 되었습니다만,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어떤 일로든 마음이 약해져 어느 신에게라도 도움을 간구하는 모양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저의 유일한 기도인지라 "예, 예" 하며 십수 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의 차이를 떠나 올곧은 신념을 변치 않고 오랜 시간 지켜나가는 모습은 주위를 숙연하게 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장인 어르신이 저희 도착하고 며칠 뒤에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는데,

그 날따라 어르신의 서재나 진배없던 소파 테이블 위의 낡은 성경책이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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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면 눈 나빠진다니까 멀찌감치 물러서더니 할아버지 돋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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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 낳을 때 아내 도와주러 오신 장모님을 보고 의사가 "역시 엄마가 최고죠?" 라고 웃었는데,

그런가 봅니다. 엄마 곁에 있으면 제 딸이나 장모님 딸이나 어느 때보다 평온한 기운이 감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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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마실 가시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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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국서 살았을 때, 직장이 근처라 한동안 소격동에서 살며 안국역 주위도 자주 다녔었는데,

이제는 관광안내소에서 중국관광객들 틈에 섞여 북촌 지도를 받아드니 묘한 기분입니다.

나는 이제 여기서도 관광객이 된 걸까?


한참 맨해튼 돌아 다닐 때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내 나이 팔십이 될 때까지 뉴욕에 종일 살아도,

어느 날이든 유니온 스퀘어에서 카메라 목에 걸고 서있으면 지나는 사람들은 나를 관광객으로 볼 거라고.

전 여기서 관광객이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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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을 많이 타지 않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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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모들은 분식을 만들고, 할머니는 국밥을, 엄마는 김밥을 만드나 봅니다.

그러다 부산에서 보았던 흑염소 집 식당 간판이 떠올라 웃었습니다.


'염소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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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8경을 돌아 볼까하고 시작한 길인데, 올라 갈수록 칼바람이 세차 30분쯤 지나니 볼이 얼얼해졌습니다.

결국 여기가 어디라서 어디를 가야하는 게 아니라 그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튀다시피 걸었습니다.

차라리 산티아고 순례 길을 가고말지, 2월의 북촌 8경은 못할 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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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오고나니 한결 숨통이 트였습니다.

일대가 몰라 볼 정도로 바뀌어서 자주 다녔던 정독도서관을 찾고 나서야 겨우 방향을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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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중/여고 돌담길이 출퇴근 길이었습니다. 이 쪽으로 해서 인사동을 가로질러 종로로 빠지는...

늦게 일어날 때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교복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야 해서 민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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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돌담길의 끝에 인사동 길과 마주한 곳의 빌딩 옆에는 공중전화가 있었습니다.

비 오는 날은 비가 와서, 비가 안 오는 날은 비가 안 와서 술을 먹어야 한다는 직장후배가 한번은 그 안에서 곤히 자고 곧바로 출근한 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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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의 헌책방 거리도 찾았는데 서점도 많이 없어졌고, 소매로 구입하기에는 파는 쪽이나 사는 쪽이나 불편해졌더군요.

요즘은 헌책도 온라인 거래가 활발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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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인 결혼식 참석이 아니라도 오랜만의 한국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동대구역에 내려 택시로 중앙통에 나갔는데, 역사나 거리나 정말 달라진게 많지 않아 놀랐습니다.

삼성 라이온스 새로 짓는다는 구장 얘기를 물어봐도 기사 아저씨는 잘 모른다며 그러냐고 반문하시는데,

메리엇이 들어서면 뭔가 달라질까요?


몇십 년 단골 금곡삼계탕으로 직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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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가라 말하기 뭣할만큼 휑하던 거리였는데, 밤마실 다니는 사람들을 반기듯 울긋불긋하게 색조화장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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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해진 거리를 피해 에스닷몰이라는 문구백화점으로 들어 가 저녁시간을 보냈습니다.

딸내미 한글교재도 사고, 아내는 순정만화 그림 필통에 저는 반가운 마음에 모나미 볼펜 6자루를 샀습니다.

사실 모나미는 한국 가면 살려고 벼르던 153 1.0 모델입니다. 바코드가 있는 노란색 몸통을 가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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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 아트 스트리트 거리' 라고 해서 범어역에서는 많은 공간을 할애해 작품 전시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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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per 의 'gas' 가 연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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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샵에도 따라 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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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텔 앰버서더 대구


에서 묶었는데, 최근에 fairmont 체인을 맛나게 드신 accor hotels 계열로 대구의 호텔들 중에서는 로케이션으로나 시설로나 첫손가락에 꼽혀도 손색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이론적으로는 -_- 호텔 포인트로 숙박이 가능한 유일한 대구의 호텔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하얏 기준으로 category 3 정도로 보이나 (hyatt santa barbara 의 예를 삼아) 로케이션에 가산점을 더 얹어 up to category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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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바라 본 '228기념 중앙공원' 입니다.

저 공원터는 사실 '중앙국민학교' 가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이 학교를 나온 이만수가 학교를 찾아 왔을 때 사인해 달라며 그를 쫓아 금곡삼계탕까지 아이들이 줄을 지었던 일,

운동회 때 청백 띠 머리에 두르고 달리기하고, 집에서 만들어 온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트렸던 일,

방과 후 운동장에 줄 그어 놓고 오징어 가생하고, 운수 좋은 날이면 가다마이로 그러나 대개는 주먹야구했었던 일들 등등...


하지만 桑田碧海 라더니...

언젠가는 주차장으로 쓰이더니만 이제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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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제가 졸업할 즈음 야구부로 전학 온 녀석 하나가 일찌감치 스포츠면을 장식해 주목을 끌었는데,

바로 승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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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텔의 반대편 풍경입니다.


한때는 대백과 함께 동백도 잘 나갔었는데, 이번에 다시 가보니 어렸을 때 그렇게 커보이던 백화점은 동네 target 보다 작아 보이더군요.

잘 살아 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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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보다 어릴 때 살았던 집터도 보여 반가운 마음에 찾아갔는데 깨끗하게 비워진 음식점 주차장이 되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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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교동시장도 찾았습니다.

삶은 소라랑 김밥도 먹고, 너저분하게 붙어 있는 연예인이랑 야구선수 사진도 구경하고, 호객하는 할머니들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 가려는데, 자꾸 뒷통수가 가렵습니다.

고작 닷새라, 겨우 연락 닿은 친구들, 친척들과도 충분한 시간을 못 보내고, 오기 전에 계획했던 곳들은 가보지도 못한 아쉬움 때문이겠죠,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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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hyatt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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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하러 들어왔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번개하게 될줄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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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시계가 마음에 들어 가격 봤다가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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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마주한 벽에는 이우환의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었습니다.

헷갈리는 순간입니다.


파크 하얏이라면 한국에서는 잘봐주면 다섯손가락 안에, 적어도 열손가락 안에는 들어 갈만한 호텔이라 인테리어에 제법 투자를 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이우환 작품을 두 점씩이나 그것도 일반 객실이 위치한 복도에 걸어 둔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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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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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근처의 현대백화점에서 해결했습니다. 푸드코트 종류도 다양하고, 편리하고, 맛도 괜찮아 자주 다녔습니다.


그 많던 singer 는 여기 다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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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 자벌레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해 애를 데리고 갈 실내공간을 찾다 묘한 생김새에 호기심이 생겨서 택시 타고 찾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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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 보니 책 읽기 좋은 곳이라 매해 한 번은 읽는 '무진기행' 의 작가 김승옥의 단편을 찾아 읽었습니다.

역시 이 분 글은 습기 물은 곰팡이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질 빛 좋은 겨울날 오후에 읽어야 합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앓아눕거나, 고작 실연 당했다고 멍청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날씨에.


'염소는 힘이 세다' 도 이 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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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구정이 되어 처가식구들도 오고 어르신께 새배도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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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신하게 큰외삼촌에게 큰절을 올린 다음,

뒤돌아앉아 야무지게 세뱃돈을 세는 모습은 아비로서 차마 공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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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어른도 며칠 뒤 퇴원하셨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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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며칠 뒤,

딸내미 데이케어 데려다주러 가는 길에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빠, 저 사람들 어디가?"


지나는 차들, 신호등에 서있는 차들, 그 안에 사람들을 보고 던지는 질문이었습니다.


"아침이니까 일하러 가겠지."


"그럼 저 사람들은 어디가?"

"학교 가나부지."


"그럼 저 언니는 어디가?"

"yummy 먹으러 가나봐."


"그럼 아빠는 어디가?"

"너 데이케어 데려다주러 가고 있잖아."


"아니 아빠는 어디 가냐고?"

"그 다음에는 집으로 가서 일해야지."


"아니 아빠는 어디 가냐니깐?"

"..."




그 때는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기 반짝이며 장난끼 가득한 볼따구를 몽실거리던 딸내미의 말 장난일 뿐이라도,

그 때 갑자기 말문이 막혔던 기억은 열달이 흐른 지금까지 선명합니다.


굳이 잘 자고 있는 놈 깨워서 아빠가 이제 답을 찾았다고 으시대진 않을려고 합니다만,

그래도 실마리라도 잡은 지금 메모해둘려고 합니다 :-)


"꼭 갈 데는 없다.

그냥 어디든 같이만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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