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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 교수 졸업식 축사 [댓글에 03.23.2024 인터뷰 추가]

urii, 2022-12-29 19: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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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쳤을 이메일을 이상하게 오늘은 열어보다가, 지난 여름에 허준이 교수가 했다는 졸업식 축사 영상이 링크되어 있어 듣게 되었네요.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바쁜 마음으로 내다보는 지금 시기에 곱씹어보면 좋은 생각인 것 같아 퍼옵니다. 지금보니 이 분 사르트르가 따로 없네요. 

 

저를 위한 밑줄: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https://youtu.be/OLDhaqosPtA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80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3만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 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3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17 댓글

밍키

2022-12-29 20:15:28

졸업식 축사가 매우 심오하네요. 공유해주신 유리님 고마워요! 

urii

2022-12-30 06:30:25

사실 스피치로 전달하기에는 단어선택이나 문체고 썩 안맞긴한데 아랑곳않고 담담하게 전달하는게 외려 신선했어요

복숭아

2022-12-29 22:08:39

결국 똑같이 다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아등바등 다이나믹하게 각자 다르게 사는게 삶의 묘미이려나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urii

2022-12-30 07:03:34

단계단계 마일스톤 달성에 급급하다보면 지나온 삶은 성에 안차고 앞으로의 인생은 불안하기 쉽겠죠. 엄청난 걸 이뤄낸 선배가 무턱대고 늘어놓는 결과론적인 성공담에서 용기를 얻기에는 현실의 체감무게가 특히 한국의 사회진입생들에게 좀 큰거 같아요.

하나도부럽지가않어

2022-12-29 22:27:18

전에 이 축사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배댓이, 

 

"축사를 듣고 가슴이 웅장해 지다 서울대 졸업생들에 보낸 메세지라는 걸 깨달았다"였죠.

urii

2022-12-30 07:13:01

ㅋ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메시지일텐데, 청중을 의식해서 단어선택을 거리낌없이 한건가 하는 느낌도 들죠

마일모아

2022-12-30 05:59:04

유툽으로만 봤었는데 글로 옮겨 적힌 것을 보니 느낌이 다르군요.

 

글 감사드립니다. 

urii

2022-12-30 07:14:40

역시 화제가 한번 되긴 했었나 보네요. 네 아무래도 고심해서 다듬어 쓴 '글'이라는 느낌이 확들죠.

두비둡

2022-12-30 07:07:58

요약하신 것이 참 와닿습니다 고맙습니다ㅎ

monk

2022-12-30 13:10:27

똑똑한 사람들은 생각의 깊이가 다른가봐요. 딱 저 나이에 새로운 시작을 하는 울 아들에게 들려줘야 갰어요.. 감사합니다.

오하이오

2022-12-30 22:42:24

많은 청년이 지나치게 안정적인 직업만을 따라간다는 듯하다고 느낀 요즘 시대에 남다르게 큰 의미가 있는 축사라고 느꼈어요. 한편으로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스티브 잡스의 졸업축사가 떠 올려지고 했고요. 잡스의 축사를 '안주하지 마라(Don't settle)'로 기억하는 저만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축사 가운데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는 허준이 교수 심성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어요. 안쓰럽다는 말에서는 졸업생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부럽다는 말에는 소박함과 솔직함이 느껴졌어요.

덕분에 좋은 글(말) 잘 봤습니다.

마일모아

2024-03-23 00:16:30

인터뷰 기사가 떴길래 링크 걸어봅니다. 이번 인터뷰도 좋네요.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4/03/23/XBMJ23ZGXBGM3EQQBUFJ5RTIGI/

오리귤

2024-03-23 02:13:37

공유감사합니다! 연구를 방해하기 때문이 다음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인 인상깊네요 

urii

2024-03-23 07:11:07

감사합니다! 허준이 교수님도 그렇지만 이번에는 인터뷰어에게도 많이 놀랐어요. 진지하면서도 친근한 문답이 인상깊네요.

락달

2024-03-23 10:19:34

공유 감사합니다. 허준이 교수 인터뷰는 읽을 때 마다 연구자의 attitude를 배우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개미22

2024-03-23 10:45:59

이수중학교에서 같은반이였던분은 이렇게 아름답게 세상을 묘사하고 사유하는데 저는 늘 카드 사인업 보너스 생각과 연회비 아낄 생각만...늘 반성하면서도 계속 합니다

꿈꾸는소년

2024-03-23 13:06:30

너무 잘 읽었습니다. 울림이 있네요. 공유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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