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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죽을뻔했다 살아난 썰

빨탄, 2020-02-10 15: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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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둘째가 오늘은 national pizza day라고 자기는 Chicago pizza를 꼭 먹어야겠다고 합니다. 교회 근처에 마침 Patxi's pizza라고 있어서 (패치즈라고 읽습니다. 왜 치즈를 패는지는 모르지만, 베이지역에서는 Zachary's 다음으로 먹을만한데 둘 다 진짜 시카고 현지 맛은 못 따라갑니다) 오더해 놓고 집에 오는 길에 픽업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오더하려는데 친구를 부르면 안 되겠냐고 합니다. 이것이 마구 애교를 발사하고, 오후에 있던 언니 가야금 레슨도 선생님 아프셔서 캔슬됐다 하고, 찾아보니 아카데미 시상식도 5시라 그럼 몇 집 부르자 해서 오스카 와치파티가 급조되었습니다.

 

인원 파악이 늦어져서 교회에서 오더를 못 하고 다른 지점에서 5시에 픽업하는 바람에 5시 30분부터 녹화된 시상식을 보기 시작합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상식일 텐데 의외로 아이들이 집중하고 같이 봅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각본상에 기생충! 어른들은 '말도 안 돼', '대박' 하며 먹던 피자를 내려놓고 일어나 손뼉을 치지만 아이들은 앉아서 계속 피자를 먹습니다.

 

와 각본상에 국제장편영화상이면 이관왕은 따 놨겠다며 계속 시청을 하는데 큰애가 시상자에 대해 궁금한 걸 검색하니 혹시라도 결과가 스포일될까 조급해진 아내가 시상 소감도 마구 넘기라고 하는 걸 못 들은 척 광고만 바닥에 작은 프리뷰창으로 광고인지 아닌지 확인하며 뛰어 라이브를 천천히 따라잡습니다. 예상대로 국제장편영화상을 받고 어른들은 '이관왕!', '대단하다!'며 기립박수를 칩니다.

 

시상은 계속되고 다른 집 아들이 캡틴 마블, 원더우먼과 함께 시상자로 나온 우리 시고니 누님을 가리키며 저 가운데 사람은 누구예요를 합니다.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냐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를 발사하려는 순간 우리 애들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뭅니다.

 

롤렉스 광고가 나와서 패스트 포워드를 하는데 이제는 라이브를 거의 따라잡아서 프리뷰창에 까만 화면이 나옵니다. 대충 시간상 이 정도면 되겠지 플레이를 눌렀는데 화면에 나타난 건 오스카를 들고 있는 봉감독님. 화면 상단 글씨엔 디렉터.

 

'헉'

 

내가 무슨 일을 한거야를 알아챌 사이도 없이 미안합니다를 외치며 리와인드를 하는 몇 초가 몇 년처럼 느껴집니다. 갑자기 적막이 흐르고 본 사람은 못 본 사람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내의 눈에선 2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강도의 레이저가 나오고, 상황 파악한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집 주인장에 차마 할많하않의 분위기에 둘째만 아빠의 목숨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저를 때리는 시늉을 하여 긴장의 풍선이 터지지 않게 바람 빼기를 시도하지만 텐션은 그대로입니다.

 

역사적인 감독상과 삼관왕을 스포일러로 알게 된 사람들은 다시 시청하며 영혼 없는 와우를 합니다만 그 기쁨이 모르고 봤을 때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되는 시상식 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을 유지할 길이 없습니다, 도저히 결말을 추측할 수 없는 영화처럼. 이제는 라이브로 광고도 보며 두 주연상과 작품상만 남아있는데. 호아킨 피닉스가 뭐라고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르네 젤위거의 말도 안 들리지만 팔의 근육은 보입니다. 체지방을 엄청 줄여 건강해 보이는데 대신 얼굴의 주름은 어쩌나 죽음의 문 앞에서 연애인 걱정을 합니다.

 

작품상엔 11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조커, 10개 부문 후보를 올린 1917과 원스어폰어타임인할리우드 등등 쟁쟁합니다. 이제 이 땅에서 저에게 남은 시간은 시상식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제인 폰다의 입에서 수상자가 발표됩니다.

'Parasite'

순간 온 집안의 아이와 어른이 뛰며 소리를 지릅니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단체로 강남스타일 말춤을 추고, 한국 가수와 드라마를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있고, 한국 선수 있다고 타지역 프로팀 응원하면 왜 그러냐는 아이들이지만, 아직 보지도 못한 한국 영화가 작품상을 받는 게 기쁜가 봅니다. 2002년 홍명보님의 골과 비교되는 순간입니다만 저는 혼자서

 

'휴'

 

긴 안도의 숨을 내뱉습니다.

 

I'd like to thank the academy for saving my life. Thank my wife even though she would have done great bodily harm, and thank my daughter for sticking with me through the dark times...

 

16 댓글

shilph

2020-02-10 16:20:35

한 줄 결론: 리모콘은 배우자에게 미리 맡기자. 내 두 손에는 맥주와 안주면 충분

빨탄

2020-02-10 16:28:52

맞습니다. 저도 그랬는데 자기 모르겠다며 다시 돌려 줬네요. 집에서 footabll, basketball 때문에 티비 보는 건 저 밖에 없네요.

게이러가죽

2020-02-10 16:22:31

어후, 제가 다 심장이 벌렁거리네요. ㅋㅋㅋ 해피 엔딩이라 다행입니다.

빨탄

2020-02-10 16:31:48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는데 해피 엔딩이 됐네요.

미스죵

2020-02-10 16:32:08

글 너무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생생하네요 아주 ㅋㅋㅋ

빨탄

2020-02-10 17:05:16

감사합니다. 이십여년 만에 본 것 같은데 한 순간 빼고 재밌게 봤어요. 손님들도 가실때는 좋은 시간이었다 하시고 가셨어요, 제 앞에선.

언젠가세계여행

2020-02-10 23:30:3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몰입하며 읽었어요 재밌습니다

빨탄

2020-02-11 11:36:19

진짜 당황했습니다. 큰 딸 8살 때 뉴욕 메트로 뮤지엄에서 모네 그림 손으로 만졌을 때 비슷했습니다.

케어

2020-02-11 09:21:41

묘사가 흥미진진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빨탄

2020-02-11 11:31:11

어느 디테일 묘사로 유명하신 분이 가장 개인적인 얘기가 가장 창의적이라 그러시더라구요. 아마 퍼스날한 얘기에 디테일이 살게되는 연관이 있나봅니다.

HoSoo

2020-02-11 09:58:45

봉감독 디렉터상 수상소감보다 글말미 수상(생존?)소감이 더 절절하네요. ㅋㅋㅋ

빨탄

2020-02-11 11:32:11

감사할 분이 더 있는데 누가 갑자기 불 끄고 음악을 틀어서요.

HoSoo

2020-02-13 15:02:34

UP! UP! UP! UP!

큰그림

2020-02-11 10:49:01

"왜 치즈를 패는지는 모르지만" <-- 이 구절에서부터 아, 이 글은 심상치 않은 글이 될거라는걸 직감하고 자세 바로하고 정독했습니다. 

아 이번 오스카 관련해서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었어요. ㅎㅎ

그나저나 서부에서는 5시에 오스카를 한다는게 새삼스럽네요. 

빨탄

2020-02-11 11:38:07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는데 아재가 되면서 그렇게 됐다고 우깁니다.

샌프란

2020-02-11 12:01:29

그래도 해피앤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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