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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모아 게시판   [잡담]
인생 계획에도 없었던 좌충우돌 미국에서의 20년 삶 1

용벅 | 2023.07.15 18:28:41 | 본문 건너뛰기 | 댓글 건너뛰기 쓰기

모두들 주말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몇년만에 글을 쓰는것 같은데 오늘로써 미국땅에 발을 딛은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기 계신 회원분들과는 반대로 많이 다른 경험을 해왔기에 (물론 저보다 더 다양하고, 독특한 경험을 하신분이 분명히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추억들을 되돌릴겸 몇자 글을 적어 볼려고 합니다. 물론 약간 스토리를 줄여서 써봤구요, 시간은 2002 월드컵으로 되돌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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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내 삶의 전부였던 나는 월드컵 한국경기에 앞서

알바를 그만두고 사촌누나의 북을 빌려서 광화문, 시청, 명동 등등 길거리 응원에 나선다.

20대초반 혈기왕성했던 나와 지인들은 축구를 보고 밤새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고 그렇게 한달여간의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당시 북을 치며 몇십명을 이끌고 다니고 응원하며 다녔기에 뉴스에도 나오고 안되는 영어로 같이 응원하면서 미국분들(?)과도 많은 대화를 하곤했다.

 

월드컵이 끝난후 학교를 복학할 계획이 없었던 나는 아무런 계획없이 하루하루 지인들과 게임방에서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며 무료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이어가던 찰나에 엄마의 상담요청이 들어왔다.

당시의 엄마가 생각했던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개구리였기에, 아주 조심조심 말을 꺼내셨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에 가서 바람(?)좀 쐬고 오는건 어떻게 생각하니?" 라고 말씀을 하시길래, 한국에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잘 지내고 있는데 무슨 미국까지가서 바람을 쐬고 오란 말인가?? 의아해 했었다. 

 

당시 체육교육학과 였던 나는 선배들의 구타, 체벌 등등으로 내가 생각했었던 대학 생활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기에 첫학기만에 휴학을 하고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학교에 정이 뚝 떨어져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목표없이 방탕하게 생활하고 있었기에 부모로써 무언가 동기부여를 주실려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던거 같다. 

 

맘에 안들면 다시 돌아와도 된다라는 말씀에 나는 흔쾌히 오케이라고 대답을 한후, 유학준비에 들어간다. 토플학원을 등록하고,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당시 여자친구는 미국에서 왔었던 교포였다). 그렇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모든것이 준비가 되어 유학길에 오른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는 대한항공

747기 창문쪽 좌석이었고, 옆에 뚱뚱한 미국 아저씨가 계속 쏼라쏼라 말을 시키고 나는 당시에 영어를 하나도 몰랐기에 그냥 눈빛과 웃음으로만 대처를 했던 기억이 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입국심사에서 첫 난관에 부딛힌다.

I-20 서류가 잘못됐다는 이민관의 말과함께 나를 세컨더리 룸으로 데리고 가셨다. 당시 영어가 거의 불가능 했기에 대한항공 직원이 와서 도와주셨고, 학교에서 보내준 서류의 날짜가 잘못됐다는 말을 들었고, 직접 학교에 전화를 한후 확인하는데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당시 다시 한국에 가야한다는 두려움에 약간 겁이 났고 무서웠었다. 

 

유학원을 통해서 하숙집과 택시를 예약했었던 나는 입국심사 때문에 3시간이나 지연되었기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계속 기다리고 계실까라는 걱정이 들어 공중전화를 사용해 전화를 드릴려고 시도했지만, 아무리 해봐도 전화를 어떻게 하는지 몰랐었고, 동전도 없었기에 포기하고 공항밖으로 나갓다. 순간 내 이름 푯말을 들고계신 택시기사님을 발견하면서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무사히 하숙집까지 데려다 주셧던 아저씨께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나중에 성공하면 꼭 보답하리라 명함까지 받앗다.

당시 LAX 공항에서 나와 올려다봤었던 파란하늘과 내 살을 스쳤던 뽀송뽀송한 바람의 느낌을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좋다. 

 

엘에이 코리아타운에 들어서는데 들었던 첫느낌이, 이게 세계최대 강국 미국이 맞나 할 정도로 한국의 80-90년대를 보는것만 같았다.

첫날 그렇게 무사히 입국을 하고, 이튿날부터 엘에이의 생활이 시작된다. 당시 하숙비용은 하루 한끼포함 $550 이었고. 3개월 정도 후에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해주시는 밥이 너무 맛이 없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하숙집에서 시간맞춰서 밥 먹는 일이 줄어든후로는 하숙집 아주머니께 밥을 안먹겠다고 말씀드려 월 $450로 줄어든다. 그 이후로 아주머니께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뀌고 집에있는 전화도 왠만하면 쓰지 말라고 하셨다. 당시에 한국에 전화를 할려면 카드를 사서 번호를 입력한후에나 할수 있었다. 당시 셀폰은 1년후에나 만들었었다. 연락할 사람도 없고, 딱히 필요가 없었기에....

 

20대초반이었던 나의 주식은 아침은 과자 한봉지 또는 거의 굶을때가 많았고, 점심은 학교앞 잭인더박스에서 99c 햄버거 3-4개 정도 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은 라면또는 삶은계란이 주식이었다. 주말에는 집 근처에 "엄마집" "이모집" 이라는 초저렴한 한국식당이 있어서 아침메뉴는 당시에 $2.99였던걸로

기억하여 주말 아침은 무조건 거기서 해결했었다. 

 

미국 입국후 얼마되지 않아 생일을 맞이한 나는 생일날 동네 한바퀴 산책을 하기로 하고 나간다. 근처에 조그마한 공원같은게 있었는데, 멕시칸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게중에 스패니쉬를 하는 한국아저씨도 계셨었는데, 축구 좋아하면 같이 하자고 하셔서 같이 플레이를 했었고, 경기후에 멕시칸 아저씨 한명이 전화번호를 주면서 꼭 전화하라고 하셨다. 내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며 자기팀에서 같이 뛰면 좋겠다고 해서, 그때 갑자기 어렸을때 엄마가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이 사탕같은거 주면 절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간다. 일단 전화번호는 받았지만 연락은 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셀폰이 없던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도 했었다. 약간 무서운 면도 있었기에....

 

그렇게 유익한(?) 생일을 보내고, 학교가 시작하여 학교에 첫 ESL 레벨 테스트를 보러갔었다. 결과는 예상했듯이 충격적인 가장 낮은 레벨이 나왔었고,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학교 끝난후 매일 도서관에서 숙제/공부하고, 집에와서는 뉴스를 보면서 영영사전을 보고 단어장을 만들며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었던거 같다. 약 6개월-1년정도 그렇게 했더니 영어의 대한 감도 잡히고, 대화할때 자신감도 붙었었지만 햄버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시킬때 항상 몇번이곤 할말을 연습하곤 했엇다.

 

교회를 나가면서 또래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었고, 일년만에 셀폰도 만들고, 하숙집을 나와서 친구들과 룸메이트를 하면서 지내기 시작하고. 지인들이 좀 생기면서 알바도 하기 시작했다. 첫 알바는 엘에이 코리아타운에 있는 고층빌딩안에 전단지 돌리기였는데. 단기알바 였었고, 시간당 $6 받았던걸로 기억한다. 

그후에 했던 알바는 Catering (결혼식 또는 Private Party) 알바였는데 주중에는 금요일, 주말에는 토요일 하루만 일하면 되었기에 학생이었던 나에겐 딱 맞는 일이었다. 당시에 4-5시간하고 $150 벌었기에 수입도 쏠쏠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퍠션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뉴욕으로 학교를 옮길려고 알아본후 얼마되지 않아서 뉴져지에 있는 영어학원(?) 으로 등록을 마치고, 친구들과 이별파티를 하고 뉴져지로 떠나게 된다. 

 

당시에 우연히 만나게된 첫사랑이 있었는데, Santa Monica 3rd Promande 거리에 A/X 라는 옷 매장이 있었었고, 쇼핑을 하러 갔었던 나에게 당시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녀는 프로모션이라는 이유로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물어봤었고, 그후로 연락이 계속 오게 되어서 친구와 연인사이로 발전하며 지내게 된다.

당시 차도 없었던 나였는데, Marina Delrey 에 살았던 그녀는 한밤중에도 내가 보고 싶다며 코리아타운까지 운전해서 왔었고 드라이브도 같이 하고 많은 추억도 만들었지만 어렸고 서로의 가는길도 달랐었기에,(당시 그녀는 퍠션업계 인턴 & 졸업반, 나는 유학생 1년차 ESL 학생)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별후에

계속 전화와 싸이월드로 연락도 했지만, 그녀는 서부끝 나는 동부끝에 살았었기에 그렇게 인연의 줄을 놓치게 되었다.

 

그렇게 엘에이의 짧았던 유학생활을 마치고 세계최고의 퍠션의 중심지 뉴욕으로 옮기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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