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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정운영

오하이오, 2018-09-24 22: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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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jeong_01.jpg

학생과 선생은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며 강의실에 있었다.

담배 연기로 가득한 강의실, 맞은편 칠판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0924jeong_02.jpg

공황론' 수업이었다. 전공도 아닐뿐더러 경제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분 수업은 한번 들어 봐야겠다 싶어 F를 각오하고 달려들었던 과목이었다.

 

(그래선가, 성적표를 붙여 복사해 주던 성적 증명서엔 교수의 이름이 있었지만

전산화하면서 이름이 빠지고 과목에 성적만 보이는 건 내겐 꽤 서운한 일이다.)

 

0924jeong_03.jpg

재작년 그분의 책을 받았을 때도 그날 강의실 풍경이 먼저 떠올랐다. 

 

0924jeong_04.jpg

정운영 선생께서 돌아가신 10주기를 맞아 엮어낸 칼럼 모음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9월 24일은 거기에 3년을 더해 13주기가 되는 날이다.

 

0924jeong_05.jpg

추도식 삼아 책을 폈다.

이 책엔 내가 마음대로 스승 삼은 '네 분'이 엮여 있었다.

 

0924jeong_06.jpg

신영복 교수님. 책의 제목 글씨는 선생께서 쓰셨다. 

이 책이 발간된 건 2015년 가을, 신영복 선생께서는 2016년 1월 돌아가셨다. 

 

0924jeong_07.jpg

장영희 교수님( https://www.milemoa.com/bbs/board/4779768 ),

'10월의 크리스마스'는 정운영 선생께서 장 교수님에게 쓰는 팬레터인 셈이다.

글 머리에 정 선생님이 눈시울을 적시며 본 글은, 

 

 

0924jeong_08.jpg

'눈물의 미학'이다. 이 글을 보던 심정을 묘사하길. 

 

흔들리는 곳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평소의 신조를 깨고, 강의 뒤 자정 가까운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시울이 화끈하더니 책 위로 무엇이 후드득 쏟아지는 게 아닌가. “내 이 아줌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

('10월의 크리스마스' 전문: https://news.joins.com/article/404045 )

 

0924jeong_09.jpg

'10월의 크리스마스'는 투병으로 칼럼을 중단한 

장영희 교수님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쾌유를 비는 크리스마스카드를 10월에 당겨쓴다 했는데 

정작 정운영 선생께서 이 글을 쓰신 다음 해 2005년, 

2009년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 보다 4년 먼저 돌아가셨다.

 

0924jeong_10.jpg

그리고 익명의 'J형'이 나의 네 번째 스승이다.  

그 명성이 다른 세분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와 친하기가 다른 세분과 다르고 

무엇보다 여전히 오가며 만나기에 배우는 건 훨씬 많았다.

 

(장영희 교수가) 글을 어찌 이리 잘 쓰냐는 정운영 선생의 질문에 J선배가 내놓은 답은,

“어깨에 힘을 빼서 그럴 거" 란다. (읽는 순간 그분 목소리가 바로 연결됐다.) 

 

"남을 씹고 조지고 그래서 돌아올 반격까지 재고 따지기 일쑤인 우리네 글과 달리, 

그는 힘을 빼고 소리를 낮춰 사랑과 희망과 평화를 즐겨 다룬다." 

  

0924jeong_11.jpg

책을 덮으며 날개 사진을 보니 

다시 담배 연기 가득한 강의실에서 어스름하게 보이던 그날 모습이 떠오른다.

 

벌써 13년이라니....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곱씹어 본 신문 칼럼이 없다.

16 댓글

Heima

2018-09-24 23:14:18

이 곳에서 정운영 선생님 이름을 만나게 되니 반갑네요. 개인적으로 선생님께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과 같은 선생님의 칼럼집과 <노동가치이론>등의 연구서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깊은 사유를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주 들춰보지 못하지만, 이 중 하나는 미국오면서도 들고온 몇 안되는 한국어 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구요. 아름다운 한국어와 깊은 사색을 함께 보여주었던 선생님의 칼럼들이 생각나는 밤이네요. 정운영 선생님을 다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하이오

2018-09-24 23:59:35

정운영 선생님께서 들으시면 기분 참 좋아 하셨을 것 같아요. 말씀하신 느낌 하나하나 선생님이 평소 추구하시던 바가 아니었을 까 짐작해 봅니다. 특히 '사색'을 보여주셨다는 말에 제가 왜 미처 그걸 끄집어 내지 못했나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결벽이라 할 만큼 생각도 깊고 꼼꼼하게, 글도 그렇게 쉽게 놓치 못하고 토시 하나까지 보고 또 보시던 모습이 떠 오르네요.

Heima

2018-09-25 16:38:18

정운영 선생님께서 이곳에서 여러모로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는데, 지금 계신 곳에서는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네요. 오하이오 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보시며 더욱 미소지으셨을 거라 믿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선생님의 글에는 깊이와 꼼꼼함이 있었지만, 저는 그 외에도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통찰력있는 비유에도 항상 감탄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한번 선생님 책을 꺼내어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따뜻한 사진과 글들을 통해 많이 위로받습니다.

오하이오

2018-09-25 20:32:27

인사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 계신 곳에선 부디 모든 것 내려놓고 편히 계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적어도 더 이상 병마와 싸우실 일은 없겠지요. 

쉴트호른

2018-09-25 00:25:40

고등학교 때 한겨레신문에 실린 정운영 선생의 칼럼을 주의 깊게 읽곤 했는데...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네요. 늘 따뜻한 글과 사진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하이오

2018-09-25 06:33:31

그러시군요. 저도 한겨레에 칼럼 '전망대로' 처음으로 알게 됐는데요. 반갑습니다!

지금도 그 칼럼의 '컷'이 기억이 남아서 찾아 보니 있네요. 혹시 제 기억과 같을지요.

n-DEFAULT-628x314.jpg

 

대중적으로는 신문 칼럼 말고도  '100분 토론' 초대 사회자로 잘 알려졌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보니 손석희 사회자 이전에 정운영 교수께서 터를 잘 닦아둔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쉴트호른

2018-09-25 13:45:32

맞아요, 기억합니다 그 그림을!  아마도 88-89년 정도였을 거에요... 그때 한겨레신문이 가졌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정도의 취급을 받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ㅠㅠ 

오하이오

2018-09-25 20:35:41

맞군요. 위상의 문제는 내부적인 문제도 있을 테고, 게다가 신문 자체가 전반적으로 취급을 해주지 않는 시대가 되서 그런 것도 같아요. 야튼 거기도 좋은 시절이 있었죠. 

참치

2018-09-25 07:16:48

정운영 선생님 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칼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가치이론>은 연구서임에도 뭔가 따스한 글쓰기가 담겨 있어 되려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하이오

2018-09-25 20:37:32

위에 댓글 주신 @Heima 님과 거의 같은 기억을 하고 계시네요. 많이 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보면 참 딱딱하고 냉정하게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은 정말 따뜻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belle

2018-09-25 10:24:21

100분 토론의 첫 사회자로서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오하이오

2018-09-25 20:38:09

예, 저도 방송에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때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싶었어요. 

Enya

2018-09-25 14:37:47

90년대 후반쯤 한국에서 다녔던 학교에서 주관했던 문화 콜로퀴움이라는 행사에서 강연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강연중에 여기서 담배피면 안 되냐고도 하셨고 (^^) 시대의 흐름은, 움직이는 트럭에 탄 사람들이 트럭에 맨 줄로 아무리 당겨도 바꿀 수 없다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표정과 말씀이 인상깊어서 한동안 예전에 쓰셨던 (한계레신문) 칼럼을 찾아서 읽곤 했었고

유학와서 한참 정신없이 공부하던 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벌써 그게 13년전이군요.

 

제작년에는 신영복 선생이, 올해는 '화두'라는 깊이 있는 글로 큰 울림을 주셨던 최인훈 선생이..

제 젊은날 스승으로 삼았던 분들이 한 분씩 떠나가실 때 마다 세월의 흐름을 느낍니다. 

 

오하이오

2018-09-25 20:44:56

트럭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 정운영 선생 답게 솔직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힘을 모으면 강줄기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이도 많았는데요. 

정말 한분 두분 가시는 걸 보면 흐르는 세월이 두배 세배 야속해 집니다. 그래도 그나마 이렇게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달라스초이

2023-01-04 05:18:05

오하이오님 덕분에 '정운영'이라는 이름을 되새길 줄이야? 위에 칼럼의 '캐리컷쳐'는 당시 진보와 꼿꼿함의 상징처럼 여겨졌었지요. 송건호, 김중배로 이어지는 한겨레의 전성기에 칼럼리스트로서 펜의 가치를 드높이신 분으로 기억됩니다. 후에 백분토론에서 중저음의 보이스로 토론의 중심을 잘 잡아주셨구요. 청년기 좋은 칼럼은 밑줄을 그어가며 곱씹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나이가 든 것일까요? 아님 요즘은 그런 칼럼을 쓰는 글쟁이가 없는것일까요?

오하이오

2023-01-04 05:39:18

글쎄요. 없는 건지 제가 못본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용을 떠나서 글 자체가 잘 쓰인 걸 찾아보기도 힘든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사설이며 칼럼을 글공부 삼아 읽던 시절도 진작 지난 것 같고요. 아마도 그렇게 바뀐 데는 읽는 이들이 줄어서일 것 같고, 글 아닌 말로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인기도 좋고 대접도 잘 받는 것 같고, 그러니 사람도 그리로 몰리는 것 같아요. 어감에 맞게 조사 하나 고치자고 이리저리 다니시는 정운영 선생님 같은 분은 신문에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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